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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2월 12일 20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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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전(한국시간) 열린 개막식에서 구겐하임미술관 선임 큐레이터 존 핸하르트는 백남준의 생애와 예술을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 태생의 남준 백(Nam June Paik)은 20세기 후반의 예술에 ‘진정한 충격(Real Impact)’을 주었습니다.”
이어 백남준이 휠체어를 타고 마이크 앞에 앉았다. 수백명의 외국기자들이 영어로 질문했다.
느닷없이 백남준이 한국말로 크게 외쳤다. “한국말로 질문할 것 있으면 빨리 빨리 해봐.”
한국기자들이 소감을 묻자 그는 “이왕 늙어 죽으려면 이렇게 늙어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개 무량하다”고 말했다.
백남준은 영어와 한국어로 번갈아 대답하다 영어로 질문을 받고도 한국어로 대답하기도 했다. 의식적인 행동 같았다. 한국어로 기자회견이 계속되자 사회자는 “영어로 질문할 것이 있으면 해 보라”며 외국기자들의 질문을 유도하기도 했다.
백남준은 기자회견 말미에 “한국의 20세기는 한일합방 등을 거치며 세계에서 가장 고생스러웠지만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다. 21세기에는 한국이 동북아의 중심이 될 것이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인임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것은 약소민족의 콤플렉스를 표현한다”고 말하던 국내인사도 백남준의 당당한 모습에 “대가로서의 자신감의 표현인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남준의 이같은 태도는 “애국하는 길은 국적을 지키는 것이라기보다 성공을 거두는 것”이라고 말해온 평소 소신을 반영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한국어 회견’은 영어가 ‘글로벌 언어’로 자리잡아가는 듯한 분위기 속에 ‘글로벌 스타’가 ‘글로벌화’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뉴욕에서 소수언어로 21세기의 예술을 외쳤다는 점에서 ‘탈 글로벌화’의 추이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뉴욕타임스는 2페이지에 걸친 특집기사로 그의 당당함이 허황된 것이 아님을 인정했다.
“백남준은 TV가 우리 생활에 끼치는 영향을 철저히 이해한 다음, 이를 열정적인 예술로 표현한 세계에서 가장 독보적인 존재다.”
뉴욕타임스는 백남준이 새로 발표한 레이저 작품을 담은 대형 컬러 사진을 싣고 전시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1960년대 이후 주요 비디오예술작품을 설명했다. 특히 백남준이 과거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영역을 향해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는 ‘전자 마법사(electronic wizard)’라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는 백남준이 예술가로서의 재주와 아이디어의 실현, 그리고 엔터테이너로서의 자질로 인해 모국인 한국에서는 물론 미국에서도 ‘국보급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고 썼다.
<뉴욕〓이원홍기자>blue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