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는 지금…/특권층 명암]'공산귀족'의 '자본귀족'화

  • 입력 1999년 10월 31일 20시 33분


《89년11월9일. 동서독을 가로막고 있던 베를린장벽이 ‘갑자기’ 무너졌다. 이어 독일과 동유럽에는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회오리가 몰아쳤다. 90년10월3일 동서독은 하나가 됐으며 동유럽 각국에서 공산정권이 민주정권으로 바뀌는 ‘도미노 혁명’이 계속됐다. 10년이 지난 오늘 독일과 동유럽은 과연 분단을 극복하고 혁명을 완성했는가. 5회 시리즈로 점검한다.》

혁명 이후 10년을 맞은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공산주의의 잔재를 걷어내고 자본주의 국가로 변신했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온갖 특권을 향유하면서 권력을 휘두르던 동유럽의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특권층)의 운명은 어떻게 변했을까.

구동독 비밀경찰(슈타지)총수였던 에리히 밀케(91). 20만명의 정보요원을 지휘하면서 1700만 구동독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그는 현재 동베를린의 허름한 집에서 힘들게 말년을 보내고 있다. 그는 31년 경찰 2명을 살해한 혐의로 93년에 기소돼 6년형을 선고받았으나 2년 복역후 노령으로 수감생활을 견딜 수 없다는 이유로 석방됐다. 98년 구동독 탈주자 사살 명령과 관련해 다시 재판에 회부됐으나 건강을 이유로 기소중지됐다.

루마니아 비밀정보기관 세큐리타테의 책임자였던 율리안 블라드도 89년 시위대에 발포명령을 내린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풀려났다. 89년 12월 반공산혁명 시위대에 의해 총살된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세스쿠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국민을 탄압하고 권력을 남용했던 동유럽 구공산정권의 권력자들은 대부분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재판에 회부되더라도 경미한 처벌을 받았으며 그나마 고령과 건강을 이유로 풀려나거나 기소중지된 경우가 많다.

독일 베를린자유대 박성조(朴聖祚)교수는 “동유럽인들이 이들의 과거 행적을 체제유지를 위한 공직수행이나 통치행위로 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단죄와 청산작업이 매우 소극적”이라고 설명했다.

슈타지 대외첩보실장이었던 마르쿠스 볼프(76)는 구소련과 이스라엘 첩보기관의 기밀을 많이 알고 있다는 이유로 세계언론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는 97년 출간된 자서전 ‘얼굴없는 남자’, 요리책 ‘러시아 부엌의 비밀’ 등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공산정권의 최고지도자나 정보기관 간부들이 공직진출 금지조항에 걸려 활동이 자유롭지 않은 반면 중간간부층은 기존 인맥과 정보망을 이용, 새로운 체제에 적응해 오히려 삶이 윤택해진 경우가 많다.

체코의 대기업 체마폴그룹의 회장인 바츨라프 유네크는 89년 중앙당 정치국원에서 기업가로 변신했다.

그는 자본금이 25억코루나(약 861억원)인 그룹 주식의 12%와 방산업체인 옴니폴을 소유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대 동유럽전문가 사브리나 라메트교수는 저서 ‘누구를 위한 공산주의인가’에서 동유럽 공산체제 당시 기득권 세력 중 절반 이상이 혁명 이후에도 그대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 사람은 20%에 불과하다는 것.

미온적인 과거 청산작업, 자본가로 옷만 바꿔입은 ‘공산귀족’이 오늘날 동유럽의 진정한 개혁을 가로막고 있다.

▼크렌츠 前동독서기장은 著作수입-연금으로 호화생활▼

베를린장벽 붕괴 당시 동독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에곤 크렌츠(62)는 요즘 심기가 불편하다.

동독 탈주자에 사살명령을 내린 혐의로 귄터 샤보프스키 전 베를린 공산당 제1서기 등과 함께 기소돼 1심에서 6년6개월형을 선고받은 뒤 항소, 27일 라이프치히 연방대법원에서 다시 재판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크렌츠는 자신에 대한 단죄는 독일 기본법(헌법) 103조의 소급입법 금지조항에 위배된다며 유죄가 확정될 경우 유럽사법재판소에 제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통일 이후 그는 회당 500∼1000마르크(약 65만원)를 받고 서독TV 등에 출연했으며 91년에는 동독정권의 붕괴과정을 다룬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면’이란 책을 펴내 2만마르크의 인세수입을 올렸다. 그해 독일 주요 일간지에 시리즈를 게재해 10만마르크를 또 벌었다.

크렌츠는 월 1000마르크 정도의 연금과 신문 잡지 기고수입으로 현재 호화주택에서 풍족하게 살고 있다.

민사당으로 이름을 바꾼 구동독 공산당 관계자들을 만나 과거를 회고하는 것은 그의 또다른 즐거움이다.

〈파리〓김세원특파원〉clai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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