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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8년 11월 9일 07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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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원에 남아 있으면 새로운 지도자가 성장하고 배울 기회를 얻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가 남긴 은퇴의 변이다.
그의 이같은 선언은 평소 그가 보여준 과단성의 일단이었다. 그는 여론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은 해버리는’ 정치인이다.
의회 전문가들은 “가장 영향력있는 하원의장이던 그가 의장직 사임으로 더이상의 목표가 사라지면서 미련없이 의원직도 버렸다”고 평가했다.
깅리치의장만큼 유권자들의 ‘좋고 싫음’이 분명한 정치인도 드물다. 이는 중간선거 당일 C
NN이 투표장에 나온 유권자를 상대로 실시한 지지도 조사 결과로 나타났다. 지지 36%, 반대 58%. 지지자들은 그가 지닌 열정과 논리에찬사를보낸다.반면 훨씬 많은 응답자가 그의 저돌적인 성향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의 의장직 사퇴결심은 더이상 자신이 공화당의 얼굴이 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작용한 것이다.
웨스트 조지아대 역사학 교수 출신인 그는 이번 중간선거에서의 당선으로 11선 의원이 됐다. 고향 조지아주 제6선거구에서 두번 고배를 마신 후 세번째 도전해 성공한 78년 선거 이후 연속 당선됐다. 다소 독선적이란 평판에도 고향에선 그에게 필적할 후보가 없어 ‘출마〓당선’이란 등식이 성립될 정도.
그의 정치일생 가운데 최정점은 역시 94년 중간선거였다. 의회에서 만년 소수당이던 공화당 하원의석을 52석이나 늘렸다.
깅리치의 퇴진은 성추문사건으로 만신창이가 된 정적(政敵) 빌 클린턴 대통령이 중간선거를 통해 면죄부를 얻는 것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미국 언론들은 깅리치가 95년 연방정부 일시 폐쇄부터 시작해 대통령의 섹스스캔들에 이르기까지 거듭 무리수를 두었음을 상기시켰다. 즉 그가 미국 보수층의 대변자로 리더십 발휘에 실패했다는 지적이다.
〈김승련기자〉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