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脫北이남옥씨 인터뷰]北서 벗어나 「큰세상」보고 싶었다

  • 입력 1998년 3월 30일 19시 58분


96년 1월 어머니 성혜랑(成惠琅·62)씨의 북한탈출을 계기로 서방세계에 알려진 이남옥씨(32)는 27일 런던시내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동아일보와 단독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북한탈출 동기와 어머니 성씨의 근황 및 김정일 북한체제 등에 관해 세시간동안 자신의 생각을 담담히 밝혔다.

북한 김정일(金正日)총비서의 수양딸로 지내다 유럽으로 탈출해 6년째 잠적생활중인 이씨는 한국언론과의 인터뷰는 말할 것도 없고 남한사람과의 만남조차 처음이다.

이씨는 이날 변호사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이남옥입네다”라고 자신을 먼저 소개했다.

평범한 스웨터와 통이 좁은 바지 차림을 한 가냘프고 자그마한 체구의 그는 외국언론에 모습을 보였을 때의 아주머니 모습과는 달리 짧은 단발머리에 나이보다 앳되게 보였다.

그는 한국말이 다소 서툴렀으며 대신 프랑스어와 영어는 능숙했다. 영어보다는 프랑스어가 훨씬 더 유창한 편이었다.

그와 그의 어머니 성혜랑씨와 김정일의 전처이자 이모인 성혜림(成惠琳·60)씨가 함께 서방으로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언론은 물론 세계언론도 그들의 행방을 좇아 온통 법석을 떨었었다.

그런데 이씨는 “지금 자유스럽게 쇼핑도 하고 바깥나들이도 하고…. 생활에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아요. 살만 루시디처럼 갇혀 살지도 않구요. 절대로요. 공부도 하고 생활비를 벌기위해 파트타임으로 일도 하고 있는 걸요”라고 말했다. 루시디는 80년대 이슬람교를 비난하는 내용의 ‘악마의 시’라는 글을 써 당시 이란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지금도 숨어살고 있는 인물.이씨의 이같은 답변은 지금도 온 언론이 그들의 행적을 궁금해 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의외였다.

―그렇다면 왜 굳이 잠적상태로 살고 있습니까.

“언론을 멀리하고 싶었고…. 어떻게 보면 저는 남들이 얘기하기 좋은 대상에 있잖아요.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걸 원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혹시 신변안전에 위험을 느끼지는 않느냐고 묻자 “처음엔 그랬죠. 남과 북 모두로부터요. 그러나 지금은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어머니 성혜랑씨와 이모 성혜림씨의 행방은….

“어머니는 저와 같은 유럽나라에 살고 있어요. 어머니는 96년1월 혼자 북한을 떠나 제네바로 왔고 제가 찾아가 함께 나왔죠. 지금은 가끔 만나고 전화통화도 자주 합니다. 어머니가 나올때 이모도 함께 북한을 탈출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그건 틀린 얘기예요. 같이 나오지 않았어요. 정남(27)이가 있잖아요. 아마 지금도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이씨는 김정일과 그의 전처이자 자신의 이모인 성혜림씨 사이에 태어난 이종사촌 동생 김정남(金正男)과 80년대 초부터 6년간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유학했다.

―김정일사저에서 풍족히 살 수도 있었을텐데 왜 굳이 북한을 떠났나요.

“정치적 목적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정치적 압력은 받아본 적이 없어요. 하고 싶은 공부가 있었지만 그 울타리 안에서는 전혀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제 인생을 제가 선택해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김정일사저에 들어가 살게 된 동기는….

“외국어학원(중학) 영어반 2학년에 다니던 13세때 나보다 다섯살 어린 정남이의 말동무가 돼주기 위해 총비서의 사저에 들어가 살게 됐습니다. 그 때 어머니도 함께 들어갔어요. 하루아침에 귀공녀가 된 느낌이었어요. 당시 정남이는 제 나이 또래 아이는 본 적이 없는 외로운 애였어요. 저를 보더니 단 한순간도 놓아주지를 않더군요.”

그는 김정일사저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소녀였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아파트에서 직장에 다니던 어머니와 외할아버지(성유경·成有慶·작고)와 함께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자주 출장을 다니셔서 외할아버지께서 많이 돌봐주셨죠. 학교가기를 싫어했고 늦잠을 자 자주 지각하는 바람에 비판도 많이 받았어요.”

그의 외할아버지는 경남 창녕이 고향으로 6·25때 월북했다. 외할머니(김원주·金源珠·작고)는 기자, 아버지(이태순·작고)는 물리학자, 어머니는 수학교사로 일하는 등 그의 집안은 북한에서 엘리트 계층에 속했다.

―김정일총비서와 아들 김정남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엄격하긴 했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끔찍이 사랑했어요. 정남이가 어렸을 때는 항상 무릎에 앉혀놓고 살다시피 했지요. 정남이도 외국에서 공부할 때 아버지를 매우 그리워했어요.”

이씨는 자신과 어머니가 북한을 떠나 서방세계로 잠적하게 된 경위에 대해 “그것은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여러 사람들을 위해 이야기 안하도록 하죠”라고 말해 그들의 탈북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음을 내비쳤다.

―92년 북한을 떠날 때 모스크바에서 병치료중이던 이모(성혜림)를 위해 쇼핑을 해준다는 구실을 댔다는게 사실입니까.

“저는 외국을 자주 다녔기 때문에 구태여 그런 구실을 댈 필요가 없었어요. 모스크바도 자주 다녔고요. 북한을 떠나 곧바로 서방으로 나왔어요. 제네바까지 온 것은 맞아요. 제네바는 제가 많이 왔다갔다 했기 때문이죠.”

그는 북한을 떠날 때 양아버지인 김정일총비서 앞으로 편지를 남겼다고 확인해 주었다. “저를 찾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남겼어요. 내용은 ‘저를 찾으려고 물의를 일으키지 말아주세요. 저는 경솔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하고 싶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가 없어요. 설령 돈이 없어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한이 있더라도 제 능력으로 공부를 끝마칠 겁니다’라고 기억합니다.”

―언제까지 잠적상태로 살 생각인가요.

“배울 것이 있는 것만큼요.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마음이 급합니다. 무엇이든 사회에 보탬이 되고 우리 민족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어요.”

―서방생활의 적응에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6년간의 외국유학 덕택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제일 힘들었던 게 음식이었나 봐요. 그런데 서방이 그렇게 관료주의일 줄은 몰랐어요. 무슨 수속과 ‘문서놀음’이 어찌나 오래 걸리는지 잘 익숙해지지 않아요. 부모자식 사이도 그렇고…. 부러운 점도 많지만 아직도 잘 이해 안되는 점들이 많아요.”

이남옥씨는 현재 영국인 역사가 이모겐 오닐(31·여)과 함께 ‘황금새장’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삶에 관한 책을 펴내려고 준비중이다. 이 책은 내년 초 출간 예정이다.

―책에 담을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다 흑과 백으로 가를 수 없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싶습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그 누구의 압력이나 간섭도 없이 나쁜 점과 좋은 점이 가득한 그 ‘이상한 북조선’에 대해 보여주려고 합니다.”

이남옥씨는 82년 한국에 들어와 살다가 지난해 2월 서울 근교 분당에서 피살된 오빠 이한영(李韓永·본명 이일남)에 대해서는 아예 “묻지 말아달라”며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김정일과 북한체제에 대해 질문하자 그의 답변은 조심스러워졌다.

“대다수의 사람은 마지막으로 남은 공산국가, 독재국가, 며칠 못갈 국가, 굶어죽는 국가… 정도로 북조선을 알고 있습니다. 북을 알려면 지도자 김정일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정일을 독재자 탕아 악한으로만 안다면 화해의 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의 다른 측면, 북조선의 유일한 출로인 ‘개방’의 가능성이 그에겐 있으며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도 현재 저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도와주면서 북한을 유지시키고 통일에 앞서 남북이 서로 화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북한이 언젠가는 개방될 것으로 본다”면서 “세상이 변하고 있는 만큼 북한도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점에서 김정일을 개방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볼 수 있습니까.

“세계 소식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요. 예를 들면 20여개의 TV를 갖다놓고 전세계 뉴스를 보고 있을 정도예요. 그리고 북한의 모든 중요한 결정은 김총비서가 하는데 자세히 보면 개방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있어요. 외국인 관광과 외국투자를 받겠다는 것도 그렇고 하늘도 열었잖아요(영공개방). 그가 고립정책을 쓴다면 그런 중요한 결심을 하지 않아요. 저는 그 모든 것을 개방의 신호라고 봐요.”

―그렇다면 언제쯤 북한이 개방의 문을 활짝 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정말 잘 모르겠어요. 베를린장벽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천천히 열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갑자기 열린다면 그 수습을 어떻게 합니까.”

―김정일체제가 확고하다고 믿는가요.

“92년 제가 나올 때만 해도 확고했습니다. 정치시스템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북조선은 곧 김총비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북한의 식량난에 대해서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다는 기사를 읽고 참혹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기후조건과 척박한 땅, 산성화된 농토, 지리적 조건, 정책적인 착오가 다 겹쳤지요. 굶어죽는 애들과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김정남이 건강하지 못하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인가요.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 물론 사저에서만 생활하니까 아주 정상적이지는 않겠죠. 그러나 불안정하고, 비정상적이고, 술꾼이고, 통제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요. 물론 아버지 말밖엔 안들어요.”

북한에 돌아갈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언젠가는 돌아갈 날이 있겠죠”라고 말하고 한국방문 가능성에 대해서도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지 않는다면 생각해 볼 수 있겠죠”라고 여운을 남겼다.

김정일의 사생활에 대한 질문에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가 이렇게 받아넘겼다.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에 대해 제가 이러쿵 저러쿵 말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개인생활도 보호받고 싶습니다. 제가 떠날 때도 열여섯 식구가 쥐약을 나눠 갖고 겨울강물을 건넌 사람들만큼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자유를 찾았어요. 그만큼 제가 떠나 올 때 두고 온 가족과 친척들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남옥씨와의 인터뷰는 무려 6개월에 걸친 교섭 끝에 이뤄졌으며 자서전 집필자 오닐도 참석했다.

〈런던〓이진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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