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부터 69년까지 망명정부 수반으로, 총리로, 또 대통령으로 오랫동안 프랑스를 이끌었던 샤를 드골의 화두(話頭)는 「국민통합」이었다.
치욕의 나치점령으로 독일의 허수아비가 된 비시정부를 거부하고 40년6월17일 런던으로 망명한 드골은 다음날부터 「자유 프랑스」 방송을 시작, 대독(對獨)항전을 프랑스인들에게 호소하며 국민적 단결을 호소했다. 연합국의 승리가 확실해지면서 그의 호소는 완전히 국민통합에 집중됐다.
『국민통합이야말로 위대한 프랑스의 원천이며 우리들이 모든 노력을 쏟아야 할 대상입니다』(42년11월1일) 『종전이 다가온 지금 정부는 모든 프랑스인에게 국민적 단합을 호소합니다』(44년3월18일)
44년8월26일. 하루전 4년만에 파리로 돌아온 드골은 샹젤리제 거리에서 2백만명이 넘는 환영인파 속에 묻혔다. 국민은 전승국 프랑스의 상징인 키가 껑충 큰 드골과 함께 전쟁의 상처를 딛고 프랑스의 자존심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당시 프랑스는 패전국 못지않게 형편이 어려워 생필품 부족은 물론 전쟁 중 망명정부와 비시정부로 갈려 맞선 탓에 국민들의 정신적 분열도 심각했다. 국민통합은 시급했다. 프랑스인들은 드골이 그런 어려운 목표를 달성할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전쟁 중에도 국민통합 없이는 변화에 대한 적응이 불가능하며 2류국가로 처질 수밖에 없다는 탁월한 역사인식을 가졌던 드골. 그는 임시정부 수반으로 선출되자 즉시 자신의 구상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새 헌법의 기초작업(4공화국 헌법)에서부터 완전 마비된 도로의 복구, 탄광 및 은행의 국영화 등 경제구조개혁, 에어프랑스 및 르노자동차사 설립, 고급인력양성을 위한 국립행정학교(ENA) 개교 등이 이어졌다.
『44년8월부터 46년1월까지 이루어진 이같은 업적은 놀랄만한 것』이라는 역사가 장 투샤르의 평이 아니더라도 사전준비가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부역자들의 처벌을 비롯한 그의 일방통행식 일처리에 불만이 쌓이고 의식주 등 일상의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자 여론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감지한 드골은 46년1월 임시정부 수반직을 사임하고 시골로 떠났다.
프랑스 국민들은 12년 뒤인 58년 드골을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불러냈다. 그의 나이 67세. 알제리 문제로 악화된 군부의 불만을 무마하고 분열된 나라를 추스르기 위해서는 드골의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공감대 때문이었다.
54년부터 격렬해진 알제리 전쟁은 프랑스의 내환(內患)으로 이어지면서 갈등과 위기는 드골이 이 문제를 완전 해결하기까지 7년여간 계속된다.
드골은 이번에는 국민통합의 수단을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에서 찾았다.
의회에서 5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그는 즉시 헌법개정에 착수해 임기 7년 비상대권 등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강화해 강력한 통치기반을 마련했다. 이때부터 3년여동안 그는 국론의 분열과 유혈사태를 막으면서 알제리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념한다. 61년4월에는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미셸 드브레 당시 총리가 반란군의 낙하산 침투를 막기 위해 파리시민들에게 인간 바리케이드를 칠 것을 호소할 정도로 상황은 다급했다. 드골은 마침내 군복을 입은채 TV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한 줌밖에 안되는 은퇴장군들이 알제리에 반란을 선동하고 있다. 나 드골은 프랑스의 이름을 걸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반란군을 진압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TV연설이 방영된뒤 반란군은 내부분열이 일어나면서 이틀뒤 스스로 소멸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후에 드골은 회상록에서 「그들은 아주 중요한 변수 하나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 변수란 바로 나 드골」이라고 적었다.
프랑스인들은 드골이 2차대전때는 군인으로서, 알제리사태때는 대통령으로서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해 국가의 분열을 막았다는 의미에서 「프랑스를 두번 구한 인물」이라고 부른다.
〈파리〓김상영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