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장소 놓고 美 필리조선소 vs 韓 조선소 이견
마스가 활용, 한미 ‘병행·공동 건조’ 방안 부상
美 핵잠 협력사업과 K-핵잠 독자사업 ‘동시 진행’
글로벌핵잠생태계 진입으로 K-방산 경쟁력 극대화
미국 버지니아급 핵추진잠수함 ‘USS 미주리함’. 동아일보DB
한국과 미국의 ‘조인트 팩트시트(Joint Fact Sheet·공동 설명자료)’ 발표가 예상보다 지연되고 있다. 팩트시트에는 이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이뤄진 한미 정상회담의 주요 합의 내용과 사실관계가 담길 예정이다.
핵심은 경제와 안보다. 관세 협상 내용이 중심인 경제 분야도 중요하지만, 최근 관심의 초점은 안보 분야의 세부 내용이다. 바로 한국형 핵추진잠수함(K-핵잠·K-SSN) 건조 사업 때문이다.
정상회담을 계기로 물꼬를 튼 K-핵잠 건조 사업은 미국 행정부 내 복잡한 이해관계로 인해 의견조율에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핵잠 건조 장소를 놓고 불거진 한미 양국의 견해차를 좁히는 것이 관건으로 꼽히고 있다.
지난 8월 미국 필라델피아 한화필리조선소에서 열린 선박 명명식에서 이재명 대통령, 조쉬 샤피로 펜실베니아 주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환영사를 하고 있다. 한화 제공
K-핵잠 건조 장소, 한국 VS 미국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한국형 핵잠의 건조 승인 소식을 알리며 그 장소를 필라델피아의 한화필리십야드(필리조선소)로 특정했다. 사실상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 연계도 강조했다.
반면 한국 정부와 정치권 안팎에선 미국 내에서의 건조가 불가하다는 의견이 많다. 우리 손으로 핵잠을 만든다는 취지에 어긋나고, 필리조선소에 잠수한 건조 인프라가 없기 때문이다. 핵잠을 만드는데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국내 관련 산업의 미래를 위해서도 미국 내 K-핵잠 건조는 피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건조 장소를 둘러싼 논란이 불거지면서 K-핵잠 사업 추진이 더 까다로워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0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K-핵잠의 미국 내 건조를 언급하면서 사업 추진이 더욱 복잡해진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조선업의 부활을 상징하는 마스가 프로젝트에 고난도의 핵잠 건조 사업까지 더해진 탓이다.
한편으로 미국 정부 그리고 미국 방산업과 조선업에 있어 필리조선소의 중요성이 그만큼 커졌다는 긍정적 의미로 해석된다. K-방산과 K-조선에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기회인 것이다. 그렇기에 한미 양국이 공동의 이익을 확보할 최선의 방안을 찾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것이 업계와 전문가들의 평가다.
美 국방부(DoD)가 공개한 차세대 공격형 원자력추진잠수함 SN(X) 개념 이미지.
핵심 쟁점은 ‘통제권·경제성·공급망’
전문가들은 K-핵잠 건조 장소를 둘러싼 3대 쟁점으로 통제권과 경제성, 공급망 등을 꼽는다.
주권적 통제권 측면에서는 필리조선소가 미국 방산업체로 지정되면 K-핵잠이 미국 현지 법체계와 규제하에 들어가게 된다는 분석이다. 이 경우 독자 수출이나 부품 개발, 정비·MRO 등 모든 단계에서 미국 승인을 받아야 하는 구조가 되고 고비용·통제 리스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경제성은 투자금 회수 관련 수익성 관련 쟁점을 말한다. 만약 국내 조선소에서만 핵잠을 건조하게 되면 우리 해군용 내수 물량 이후 수출이 요원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K-핵잠 사업은 미국 핵잠 건조 협력과 병행돼야 경제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논리다. 업계 관게자는 “수조 원을 들여 함정 도크를 구축하더라도 내수 중심 시장에서는 수익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해외 판매 등 수주 확대를 위해 미국 내 원잠 건조 협력에 참여해 관련 이력을 확보하는 것이 미래 성장을 위해 용이하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공급망 편입 문제도 있다. 미국은 버지니아급 핵잠(SSN) 40척 확보를 추진 중인데 현재 24척이 취역했다. 호주에 5척을 공급하는 사업(AUKUS)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코네티컷과 버지니아의 두 조선소는 연간 1척 수준 생산량에 머물러 있어 공급 병목이 심각한 상황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 한국의 조선 역량이 미국 원잠 공급망 공백을 메울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한화필리십야드(한화필리조선소)
해법으로 떠오르는 한미 ‘병행·공동 건조’
최근 업계와 전문가를 중심으로 양국 병행·공동 건조 방안이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해법으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의 전략적 협력을 기반으로 미 해군이 사용할 버지니아급 핵잠은 필리조선소에서, K-핵잠은 한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이다.
필리조선소의 핵잠 건조 인프라 구축에 들어갈 막대한 비용은 약 1500억 달러(약 208조 원)에 이르는 마스가 펀드를 이용하는 것이다. 어차피 해당 자금이 미국 조선업 재건에 쓰일 예정이기 때문에 필리조선소에 투자된다면 핵잠 건조 비용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부지 확보도 어렵지 않다는 의견이다. 올 8월 한화가 발표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한화는 마스가 펀드를 활용해 필리조선소에 약 12만 평 규모의 블록 생산기지를 신설할 계획이다. 블록 생산기지는 상선보다는 함정 같은 특수선 생산을 위한 부지인 것으로 전해졌다. 부지만 확보되면 잠수함 하중을 견딜 수 있는 지반 개조 공사는 어렵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공사가 완료되면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핵잠 건조 인프라가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방산 라이선스 확보, 핵잠 건조를 위한 핵연료 취급 관련 인허가 등은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지목한 만큼 미국 당국과 협의를 통해 신속 승인 절차(패스트 트랙)를 밟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화필리십야드(한화필리조선소)필리조선소에서 미국 핵잠을 만들 때 한국에서는 K-핵잠 건조를 진행하는 것이다. 필리조선소의 핵잠 건조가 현실화할 경우 국내 협력사들의 모듈, 블록, 배관, 제어시스템 등 핵심 기술이 대거 투입될 수밖에 없다. 원자로 냉각기술, 해양플랜트 설비, 특수강 생산 분야의 성장도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확보한 기술과 노하우를 활용해 K-핵잠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국내 조선소와 협력사가 글로벌 핵잠 공급망에 직접 진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한 방산 전문가는 “병행 건조는 단순한 기술 협력이 아니라 산업 구조 재편의 문제”라며 “조선, 기계, 원전 산업이 함께 연결되면 K-핵잠은 단순한 군함이 아니라 첨단 산업 집약체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필리조선소 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라며 “트럼프 행정부 임기 내 제도적 틀을 마련하지 못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美 핵잠수함. 동아일보DB
여야 정치권 한 목소리…“양국 공동 건조해야”
국내 정치권에서도 양국 공동 건조를 현실적인 대안으로 평가하고 있다. 김용태 국민의힘 의원은 최근 필리조선소를 방문해 ‘미국 잠수함은 미국에서, 한국 잠수함은 한국에서 짓는다’는 원칙을 유지하며 ‘트윈 생산 체제’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의원은 “필리조선소는 한미 양국이 산업과 안보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상징이 될 것”이라며 “양국에서 건조하면서 기술과 생산을 공유하는 병행 체제가 한국과 미국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구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승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번 협력은 천재일우의 기회”라며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에 병행 건조 제도적 기반을 확보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한국이 글로벌 핵잠 생태계에 편입되면 단순한 기술 수혜를 넘어 방산 수출과 해양 전략의 패러다임이 전환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업계에서도 K-핵잠 사업 추진에 대해 한국 조선의 역할이 재정의되는 과정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핵잠은 단순 군사 프로젝트가 아닌 조선·기계·에너지·원전 산업 전반의 기술 융합체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국내 한 방산 전문가는 “한국형 핵잠 사업은 우리 조선 기술이 세계 군함 공급망에 본격적으로 편입되는 계기”라며 “한미가 병행 건조를 통해 기술 공유와 상호 인증 체계를 구축한다면 장기적으로는 독자 핵잠 개발도 현실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국 이번 논의는 ‘누가 만드느냐’보다 ‘어떻게 협력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적 의지와 한국 조선산업의 역량이 맞물리면 K-핵잠 사업은 수십 년 묵은 숙원에서 전략산업으로 전환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한미 협력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생태계 편입을 위한 구조적 진화”라면서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 제도적 합의가 이뤄진다면 K-핵잠은 한국 조선산업의 다음 세기를 여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