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SF 뒤엔 ‘와패니즈’ 감독이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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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상상력 공급처 日 애니메이션

영화 ‘채피’에서 경찰용 로봇으로 사용되다 우연히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인공지능을 갖게 되는 로봇 채피. 머리 위에 뻗은 토끼 귀 모양 장치가 일본 만화 ‘애플시드’의 브리아레오스(작은 사진)와 흡사하다. 영화인 제공·동아일보DB
영화 ‘빅 히어로’에 등장하는 미국 샌프란시소쿄의 거리 풍경. 영어로 ‘키쿠치’라고 쓰인 간판과 기와지붕, 벚꽃 등이 어우러져 일본 분위기가 물씬 난다. ‘빅 히어로’ 화면 캡처
영화 ‘빅 히어로’에 등장하는 미국 샌프란시소쿄의 거리 풍경. 영어로 ‘키쿠치’라고 쓰인 간판과 기와지붕, 벚꽃 등이 어우러져 일본 분위기가 물씬 난다. ‘빅 히어로’ 화면 캡처
12일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 ‘채피’,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빅 히어로’, 2013년 화제작이었던 ‘퍼시픽 림’까지 최근 몇 년 새 개봉한 할리우드 SF 블록버스터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영향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일본 영화, 애니메이션 등 일본 문화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서양 사람들을 ‘와패니즈(Wapanese)’라고 부른다. ‘닮고 싶다’는 워너비(Wannabe)와 일본을 뜻하는 재패니즈(Japanese)를 합친 말이다. 요즘 할리우드 SF 블록버스터는 바로 이 ‘와패니즈’들의 손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채피’의 주인공 로봇 채피는 비죽 솟아오른 토끼 귀 모양 장치를 달고 있다. 마치 동물 귀처럼 감정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인공지능을 가진 채피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보여준다.

이 장치는 바로 일본 SF만화 ‘애플시드’에 등장하는 브리아레오스를 본뜬 것이다. 애플시드는 ‘공각기동대’(1991년)의 원작자로 유명한 만화가 시로 마사무네의 1985년 데뷔작이다. 최근에도 애니메이션과 3D 영화로 만들어지는 등 일본 애니메이션 팬들 사이에서는 고전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채피의 닐 블롬캠프 감독은 영국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03년 ‘채피’의 전신인 단편영화를 만들 때부터 시로 마사무네의 엄청난 팬이었다”며 “관객들이 로봇에 공감할 수 있는 매개체로 애플시드에 나오는 브리아레오스의 토끼 귀 모양 장치를 이용했다”고 밝혔다. 영화에는 사람의 뇌 속 정보를 헬멧 모양의 장치를 이용해 기계로 이동시키는 장면도 나온다. 역시 ‘공각기동대’ 등 많은 일본 SF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있는 설정이다.

‘빅 히어로’는 아예 샌프란시스코와 도쿄를 합친 도시 ‘샌프란시소쿄’를 배경으로 한다. 붉은색 금문교 꼭대기에는 일본 신사의 문 모양인 도리이(鳥居)가 합쳐져 있고 벚꽃이 흐드러진 샌프란시소쿄의 거리에는 일본어 간판이 달려 있다. 주인공 이름 역시 히로 하마다와 타다시 하마다로 일본식이다. (국내에는 히로 아르마다와 테디 아르마다로 이름을 바꾸는 등 일본 색채를 많이 없앤 뒤 개봉했다.)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오마주도 자주 등장한다. 감독을 소개하는 엔딩 크레디트에 일본 SF 애니메이션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건담 시리즈의 일러스트를 삽입하는 식이다.

‘퍼시픽 림’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역시 스스로 ‘철인 28호’ ‘울트라맨’ 등 일본 애니메이션의 팬이라고 밝혀 왔다. 영화 개봉 당시 일본에 홍보차 방문해 건담 박물관을 둘러보는 일정을 소화했을 정도다. 퍼시픽 림에서 세계를 위협하는 괴물 ‘카이주’는 괴수의 일본식 발음이다. 로봇의 디자인이나 사람과 로봇이 연결돼 함께 움직이는 구동 방식 등도 일본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등장하는 방식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해외 진출은 1961년 만화 ‘철완 아톰’이 미국에 수출되면서 시작됐다. 이후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공각기동대’ ‘아키라’ 등이 1970∼90년대 해외에서 지속적인 인기를 끌며 여러 세대에 걸친 ‘와패니즈’들을 양산했다. 델 토로 감독은 1964년생이고, 영화 속에서 일본의 영향을 자주 드러내는 워쇼스키 남매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역시 1960년대 생이다. 블롬캠프 감독은 1979년생.

김봉석 영화평론가는 “미국이 주로 슈퍼 히어로 장르를 발달시켜 온 반면 로봇이 등장하는 성인 취향의 SF 장르는 일본에서 가장 크게 발달했다”며 “‘트랜스포머’ 성공 이후 로봇 SF 장르에 대한 수요는 많지만 그 창작의 원천은 많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에서 영감을 얻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앞으로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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