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조희제]‘막장 드라마’를 넘어선 ‘오글 드라마’의 향연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25일 15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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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타' '아결녀' 소녀시대 'Oh!' 속의 공통점

요즘 뉴스를 마치면 TV를 끄게 됩니다.

벌써 한두 달 정도 그랬던 것 같군요. 평소에도 꼭꼭 드라마를 챙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최근처럼 의식적으로 드라마를 피했던 경우는 머리털 나고 처음인 것 같습니다.

MBC ‘파스타’가 보여주는 사랑 방정식은 트렌디 해 보이지만 매우 복고적이다.
MBC ‘파스타’가 보여주는 사랑 방정식은 트렌디 해 보이지만 매우 복고적이다.


왜 그렇게 드라마를 피하냐구요? 요즘 몇몇 드라마들을 보면 시도 때도 없이 손발이 오그라들기 때문입니다. 10분 이상 보면 오그라들다 못해 사지마비와 경련이 일어날 것 같다는 공포감 때문에 TV 전원을 서둘러 끄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드라마들은 시작 전에 '35세 이상 시청 금지'나 '비위나 신경계가 약한 분들은 주의하세요' 정도의 문구로 경고 해 주길 청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특히 MBC의 주중 드라마들은 대단히 주의해야 합니다. '파스타'와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 줄여서 '아결녀' 말이죠. 아! 그 온몸을 타고 전해지는 오글거림이란, 잠시 장면들을 떠올리기 전에도 심호흡을 단단히 해야 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드는 드라마

'파스타'의 최현욱(이선균 분)은 주방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며 요리사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절대 카리스마를 가진 셰프입니다. 서유경(공효진)은 이제 겨우 주방보조에서 요리사가 된 신참 요리사죠. 누구나 예상 했듯이 이 둘 사이에 사랑이 싹트고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 이 드라마의 뻔한 스토리입니다.

'파스타'를 끌어가는 것은 이런 뻔한 스토리가 아닌 오글거리는 상황, 오글거리는 장면 그리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오글거리는 대사들입니다. 뭐 이런 식이죠.

현욱 "야 너 니가 죽고 못사는 파스타가 좋냐? 내가 좋냐?"
유경 "셰프~♥"
현욱 "선인장이 좋냐? 내가 좋냐?"
유경 "셰프~♥"
현욱 "그럼 그 선인장이 좋냐? 파스타가 좋냐?"
유경 "셰프~♥"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갖은 대한민국 성인 남녀라면 현실 속에서 결코 내뱉을 수 없는 충격적 대사들입니다. 인간미 넘치고 차분한 이성을 가진 것처럼 보여 왔던 이선균과 쿨한 성격과 보이시한 외모로 주목 받던 공효진이었기에 이런 오글거리는 대사는 더욱 충격적이 아닐 수 없더군요.

“애기야 가자!”라는 대사로 오글드라마의 원조가 된 SBS ‘파리의 연인’
“애기야 가자!”라는 대사로 오글드라마의 원조가 된 SBS ‘파리의 연인’


'파리의 연인들'에서 박신양이 "애기야 가자"를 외친 후 한국 드라마에는 새로운 경향이 생겨났습니다. 절대적인 실력과 고집불통의 자기 확신을 가진 강한 남자. 만화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사랑으로 충만한 눈으로 오직 남자만을 바라보는 여자. 그리고 그 둘 간의 참을 수 없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

따지고 보면 이 세 가지 조합은 꽤나 오래된 한국 드라마의 경향 중 하나입니다.

쿨한 성격, 보이시한 매력의 공효진의 충격적 변신

이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강한 남성은 의외로 속이 깊고,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완전히 모든 것을 바친다.

2. 여자는 다른 것 없다. 오직 남자를 향한 사랑만이 모든 시련을 극복하는 길이다.


판타지 속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현실 앞에 놓여있는 모든 권력적 관계들이 해체되고, 심지어 이 권력관계에 자발적으로 항복 선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마초면 어떻습니까? 나만 사랑해주면 되지! 키다리 아저씨보다 훨씬 진화된 극도의 여성적 판타지로 인해 마초들은 당당하게 면죄부를 받았습니다.

여성들이 이러한 판타지의 영역에 계속 존재한다면 개콘의 '남보원'과 롤러코스터의 '남녀탐구생활'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상과는 다른 현실의 영역에서 남녀는 사사건건 충돌하게 되고 그러므로 늘 탐구를 통해 이해해야 겨우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파스타'가 여성들의 판타지에서 오글거림을 이끌어냈다면, '아결녀'의 오글거림은 20대 초반 남성의 '쩌는' 허세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아결녀'는 구성이나 주제로만 놓고 보자면 한국판 '섹스 앤 시티'라 할 만 합니다. 세 명의 30대 독신여성이 각기 다른 직업과 연애관을 가지고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화해하면서 그녀들만의 세계를 살아갑니다.

MBC ‘아결녀’의 사랑은 여성의 판타지로만 채워진 유아적 수준에 그친다.
MBC ‘아결녀’의 사랑은 여성의 판타지로만 채워진 유아적 수준에 그친다.


이신영(박진희)은 이전 연인이었던 윤상우(이필모)와 새로운 꽃미남 하민재(김범)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물론 '섹스 앤 시티'와 달리 연속적인 문어발 연애 따위는 시도하지 않죠. 꽤나 올바른 태도를 가진 건실한 청년 윤상우의 지속적인 재결합 요구에도 불구하고 신영은 하민재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하민재의 대사들을 복기해봅니다. 10살 차이가 나는 자신을 거부하는 신영에게 민재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면 비켜줄께.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나타나면 내가 비켜줄께. 그때까지 나랑 만나자."

또 다른 장면에서는 흔들리는 마음으로 신영이 말합니다.

"딱 열흘만 놀자."(신영)
"장난해? 그럼 열 하루째 되는 날 나는 어떡하라고!"(민재)

앞뒤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20대 초반의 패기라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오글거리는 대사들은 글로 연애를 배운 듯한 어린 마초의 허세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저런 말을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아결녀'의 오글은 '파스타'의 오글과는 또 다른 오글거림입니다. 파스타는 공효진을 통해 여성들의 판타지가 얼마나 오글거릴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면, 아결녀는 김범을 통해 어린 수컷들의 비뚤어진 욕망을 보게 될 때 얼마나 신체가 이상반응을 보이는지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드라마적 판타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그래서 어른들을 모방하려는, 그것도 가부장적 허위에 가득 찬 마초를 따라 하려는 아이의 모습은 비단 이 드라마의 민재만은 아닌 듯합니다. 누리꾼 사이에서 '허세 근석'이라는 별명이 붙은 장근석의 미니홈피 속 문장들 속에도, 또 최근 사회적 문제가 된 졸업식 뒤풀이와 빵셔틀 문제에도 녹아있습니다.

그렇다고 성인 남성들은 이런 오글거림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소녀시대 ‘Oh!’ 역시도 30대 이상 삼촌들의 비뚤어진 욕망을 보여준다.
소녀시대 ‘Oh!’ 역시도 30대 이상 삼촌들의 비뚤어진 욕망을 보여준다.


소녀시대의 신곡 'Oh!'는 바로 삼촌세대들의 오글거림을 공략한다는 생각에서 튀어나온 다소 무리한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소녀들이 레이싱 걸이 아닌 60~70년대 미국 치어리더의 복장과 안무를 복귀시킨 것은 꽤나 의미심장합니다. 미국 문화에 대한 그 시절의 판타지를 귀환시키고는 '오빠'라는 명칭을 통해 기억도 가물가물한 청춘을 아저씨들에게 선물합니다.

"두근두근 가슴이 떨려와요. 자꾸자꾸 상상만 하는 걸요… 몰라몰라 내 맘은 전혀 몰라. 눈치 없게 장난만 치는 걸요"

사실 소녀시대의 다리를 보느라고 가사가 귀에 잘 안 들어와서 그렇지 가사를 천천히 들어보면 그 오글거림에 전율하게 됩니다. 청춘에 대한 회상과 나이 들어감에 대한 공포. 그리고 아직도 경쟁력 있는 남자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소녀들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글거림은 대중문화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고 그 오글거림의 근원에는 여성이든, 청소년이든, 아저씨든 자신이 갖고 있는 비뚤어진 욕망이 있습니다. 감추고 외면하고 싶지만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자신의 비뚤어진 욕망을 TV 속에서 대면하게 될 때 엄습하는 두려움. 그 두려움이 변환되어 오글거림으로 나타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막장드라마는 "도대체 어디까지 가나 보자"라는 심정으로 보게 됩니다. 작가와 PD의 상식을 뛰어넘는 엄청난 상상력에 감탄을 하기도 하고, 누리꾼과 언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단력과 배포에 TV 앞에서 홀로 박장대소를 터트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글드라마를 보면서는 쉽게 웃을 수 없습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신체적 변화 이전에 시청률과 교환한 대중들의 욕망이 너무 안쓰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조희제/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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