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안현진] 천만 울린 루저들의 합창…美폭스 '글리(Glee)'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18일 17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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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리(Glee)'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기쁨, 기분 전환 등이지만, 주로 사용되는 의미는 합창이다. 무대 위에서 의상을 갖춰 입은 여럿이 합창하는 모습을 연상하면 된다. 하지만 FOX의 뮤지컬드라마 '글리'에서는 일반적인 합창에 "쇼"라는 요소가 가미되어 리듬과 가사에 맞춰 춤도 추고, 가사의 내용에 따라 연기도 하는 일종의 무대공연으로 업그레이드됐다.

고등학교를 무대로 하는데다가 합창과 스포츠, 공부와 연애 등 상반되는 몇 가지 선택들 앞에 놓인 10대를 그린다는 점에서 '글리'는 종종 디즈니의 '하이스쿨뮤지컬'시리즈와 비교 당한다. 하지만 '글리'에서 합창반 코치로 출연하는 매튜 모리슨은 그런 평가를 다음과 같이 일축한다. "'글리'는 엣지있고 진지하다." '하이스쿨뮤지컬'이 당의로 예쁘게 코팅된, 어지러울 정도로 달콤한 디저트라면, '글리'는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에서 꺼낸 은박으로 포장된 초콜릿이다. 달콤하긴 달콤한데 그 안에 든 게 어떤 맛인지는 입에 넣고 깨물어 봐야 알 수 있는 그런 맛.
뮤지컬드라마 '글리'는 2010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뮤지컬 코미디 부문 TV시리즈 작품상과, 남녀 연기자상, 그리고 여자조연상까지 모두 5개 부분을 수상했다.
뮤지컬드라마 '글리'는 2010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뮤지컬 코미디 부문 TV시리즈 작품상과, 남녀 연기자상, 그리고 여자조연상까지 모두 5개 부분을 수상했다.

▶ 소외된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합창단, '뉴 디렉션'

'글리'의 배경은 미국의 중부에 위치한 오하이오의 리마라는 소도시다.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청춘물이 햇살 가득한 캘리포니아를 무대 삼는 것과는 좀 다른 설정이다. 드라마를 위해 가상으로 만들어진 맥킨리 고등학교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교사 윌 슈스터(매튜 모리슨)는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자신감 없는 삶에 지쳐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고등학생일 때 참가했던 글리 클럽의 소중한 추억을 기억해내고는 합창단 '뉴 디렉션(New Direction)'을 모집한다. 하지만 맥킨리 고교는 이미 풋볼클럽과 치어리더클럽이 주름 잡은 상태. 그리하여 오디션에는 동성애자 아빠 둘 사이에서 대리모를 통해 태어났고 평생을 쇼비즈니스에 데뷔하는 것을 목표로 정진해온 레이첼(리아 미셸), 휠체어에 앉은 아티, 흑인인 메르세데스, 게이인 커크(크리스 콜퍼), 그리고 긴장되는 순간이면 말을 더듬는 아시안 티나를 비롯해 손에 꼽을 만큼 적은 (인기 없는) 아이들이 참가하고, 전원 합격으로 합창단은 걸음마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걸음마는 실적 없는 클럽이라 학교에서 천대받고, 합창단을 눈엣가시처럼 거슬려하는 치어리더클럽의 기고만장한 코치 수 실베스터(제인 린치)의 권모술수에 걸려 한걸음을 채 떼기도 전에 넘어지곤 한다. 하지만 '뉴 디렉션'의 주인공들은 넘어지면 툴툴 털고 다시 일어난다.

확실히 '글리'의 주인공들은 평범을 넘어선다. TV시리즈의 주인공들이라고 해서 '가십 걸'(TV)이나 '트와일라잇'의 허여멀건하고 말쑥한 배우들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부잣집 아이도 없고, 구애자가 줄을 서는 선남선녀도 없다. '글리'의 주인공들은 "멜팅 팟(Melting Pot)"이라는 미국의 별명을 드라마에서 재연한 듯 다양하다.

대신 모두 한 데 섞여서 고유의 색을 잃어버리지 않고 모자이크처럼 각자의 색깔을 드러낸다. 누구보다 노래를 잘하는 레이첼, 여자보다 더 고음처리에 능란한 커크, 패션 감각이 뛰어난 메르세데스, 베이스 연주가 기가 막힌 아티 등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두 재능 있고 똑똑한 아이들이다.

하지만 '글리'의 아이들은, 재능은 있지만 학교라는 정글에 적응하지 못한 주변인들이다. 등굣길에서는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것이 일상이요, 1교시가 시작하기도 전에 슬러시 세례를 받아 닦아내기 바쁜 이들이 모였으니, 매사 쉬울 리 없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선생은 선생대로 고난을 겪는다. 마음을 잡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이상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학교라는 권력에 맞서는 점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게 '글리'는 이 아이들이 언젠가는 고치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날 거라는 긍정적인, 그리고 조금은 뻔한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그건 멜로디와 리듬이라는 순수한 기쁨을 통해서다.
\'글리\'의 주인공들은 동성애자, 장애인, 유색인종 등의 소수자다.
\'글리\'의 주인공들은 동성애자, 장애인, 유색인종 등의 소수자다.

▶ 치밀한 선곡과 부가판권시장으로 이어진 성공사례

그래서인지 '글리'가 들려주는 노래들은, 그 선곡이 탁월하다. 현재까지 방영된 13개 에피소드에서 모두 70곡의 노래를 선보인 '글리'에서 뮤지컬 장면은 실제 공연이나 리허설 상황에서만 등장한다. 그렇기에 노래가 끼어들어 장면의 흐름을 끊는 일은 드물다. 뮤지컬이기는 하지만 노래하는 장면이 가지는 판타지적 요소를 줄이고 과감하게 현실적인 방향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런 제약에도 가사와 캐릭터의 심리상태가 잘 들어맞는 데는 제작자이자 작가인 라이언 머피의 공이 크다. 그 스스로가 고등학생 시절 글리클럽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많은 무대에서 공연을 했던 머피는 "선(先) 각본, 후(後) 선곡"이라는 철칙을 세워 주객이 전도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글리'에서 노래는 도구 이상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이 살인, 폭력, 불륜이 아니라 무언가 기분 좋은 것을 보고 즐길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탁월한 선곡은 탁월한 비즈니스로 이어졌다. 저작권 개념이 철두철미한 미국에서 '글리'는 뮤지션들이 선뜻 이용권을 내주거나, 아주 저렴한 가격에 음악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미담이 넘쳐난다. 빌리 조엘도 선뜻 자신의 저작권을 내주었고, 마돈나는 모든 곡에 대해 사용을 허락한 상태, 2010년에 방영될 에피소드 중에는 마돈나의 곡으로만 이뤄진 에피소드도 있다고. 13편 에피소드 중에서 가장 많은 곡이 불려진 뮤지션은 비욘세로, '싱글 레이디' '크레이지 러브' 등 솔로로 독립한 뒤의 히트곡은 물론 '데스티니스 차일드' 시절의 노래까지 모두 4곡이 드라마에서 소화됐다.

'그리스' '카바레' 등 쇼합창에 적합한 뮤지컬 넘버와, 시청자에게 익숙한 차트 히트곡과 올드팝 등을 골고루 어울리게 고른 선곡 덕분에 아이튠즈에서 '글리'의 수록곡은 인기폭발이다. FOX는 아이폰으로 음원을 구입하는 미국 10대의 소비패턴을 이용해서 에피소드 방영 1주일 전에 수록곡을 미리 업로드 하는 등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그 결과 '글리' 음반은 디지털 판매량만 200만건에 이른다.

'글리'의 상업적 성공은 따지고 보면 철저한 시장 분석과 준비가 있어서 가능했다. '글리'는 2009년 5월 FOX채널의 인기 프로그램 '아메리칸 아이돌'의 시즌 파이널 방송 직후에 첫 선을 보였다. '아메리칸 아이돌'의 후광을 이용해 데뷔한 '글리'는 그렇게 961만명의 시청자와 만났고, 4개월 뒤 FOX가 시즌1 전체를 방송하기로 결정하면서 본격적인 시리즈로의 출발을 알렸다. 에피소드 한 편당 소요되는 제작비는 약 300만달러로, 이는 프라임타임에 방영되는 드라마 평균제작비의 1.5배에 이르며, 안무와 노래 연습 시간까지 더해져서 편당 제작기간도 10일이나 걸린다.

하지만 그렇게 공들인 덕분에 '글리'는 이제껏 시도되었던 많은 TV시리즈 뮤지컬이 걸었던 '시즌 취소'라는 징크스를 깨고 성공궤도에 진입했다. 영리한 FOX가 주요 관객층을 제대로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2010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뮤지컬 코미디 부문 TV시리즈 작품상과, 남녀 연기자상, 그리고 여자조연상까지 모두 5개 부분을 수상했다. 수상을 열흘 앞두고 FOX는 '글리'의 시즌2 방영을 결정하기도 했다.
주변인으로 구성된 합창단 '뉴 디렉션'은 지역예선에서 당당하게 1위로 입상한다.
주변인으로 구성된 합창단 '뉴 디렉션'은 지역예선에서 당당하게 1위로 입상한다.

▶ 음악이 전해주는 순수한 즐거움

전국적인 오디션을 걸쳐 아이돌이 되려는 아이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는 '아메리칸 아이돌'과 '글리'는 무대, 열정, 춤, 노래라는 드러나는 연관성 말고도 비슷한 점이 또 있다. 바로 '음악'이 가져다주는 순수한 즐거움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글리'는 첫눈에 보기엔 10대를 겨냥해 만든 뮤지컬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유치하다고 외면하기에는 뭔가 진지한 기운이 있다. 선율과 박자, 그리고 보편적인 삶의 희로애락을 노래한 가사에서 위안받는 우리들의 평범한 이야기가, 우리가 음악을 듣는 이유가 그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이 아닐까. 제작자 머피는 '아메리칸 아이돌'과 '글리'의 공통점을 끔찍한 현실을 계속해서 보도하는 뉴스 네트워크와 또 그런 현실을 그대로 그려낸 TV시리즈로부터의 '현실도피'라고 말하지만, 그보다는 인간 본연에 내재된 순수한 즐거움이 앞설 것 같다.

'글리'는 2009년 12월 시즌1의 중간 파이널을 선보이고 4개월이라는 긴 휴지기에 들어섰다. 물론 그 파이널은 그 동안 '뉴 디렉션'이 겪어온 고난을 한번에 해소할 만큼 충분한 보상이 따르기도 했지만, 다음 에피소드를 기대하게 하는 견인차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했다. '뉴 디렉션'은 지역 예선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며 본선으로 가는 티켓을 얻었고, 핀(코리 몬테이드)을 아기 아버지라고 속인 퀸(다이애나 아그론)의 비밀은 레이첼에 의해서 모두 밝혀졌다. 이제 레이첼이 오래도록 마음에 품어온 핀과 러브라인을 진행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주목될 것이다.

한편 옥신각신 으르렁대던 합창단 코치 윌과 치어리더클럽의 코치 수(제인 린치)는 새로운 전쟁을 준비한다. 윌이 거짓 임신으로 오랜 시간 자신을 속여왔던 아내 테리와 헤어지면서 그 동안 마음으로만 정을 나눴던 동료교사 엠마(제이마 메이스)와의 진심을 확인했는데, 엠마에게 청혼까지 했으나 결국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상처만 받게 된 풋볼팀 코치 켄과의 불편한 긴장도 2010년 4월 방영을 재개하는 시즌1 후반에 감초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무엇보다 4월에 이어지는 드라마 후반에는 3명의 새로운 캐릭터가 더해질 예정이라고 하니 다채로운 무대공연과 명곡들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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