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윤리 지키려 17년 버텼죠”

  • 입력 2007년 10월 15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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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2회 만에 종영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작가 양근승 씨

“먼지처럼 쌓여 온 세월이 벌써 17년이네요. 끝났다는 후련함보다 이런 내용도 써볼 걸 하는 아쉬움이 더 큽니다.”

10일 막을 내린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에는 17년 동안 변함없이 마을을 지켜온 대추나무 같은 존재가 있다. 첫 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집필해 온 작가 양근승(사진) 씨다.

1990년 9월부터 17년 2개월 동안 852회를 방영했으니 대본만 해도 200자 원고지로 10만 장 분량. 12일 드라마의 배경이었던 충북 진천군 문백면 호암마을에서 만난 그는 “원고지만 트럭으로 두 대는 족히 채우고도 남는다”며 “50대 중반에 드라마를 맡아 그 좋은 세월을 이 작품 하나에 다 보냈다”고 말했다.

드라마 ‘영산강’ ‘밀물’ ‘TV손자병법’ 등을 써온 그는 1990년 이 드라마를 맡은 이래 오로지 이 작품에만 매달렸다. 서울 은평구에 있던 집도 처분했다. 무작정 경기 양평군의 시골로 집을 옮기고 별도로 촬영장 근처에 집필실을 얻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농촌, 농부들과 일심동체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는 확신 때문이다.

“고추가 어느 정도 익었나, 수해가 나면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그런 것들이 피부에 와 닿아야 글을 쓸 수 있어요. 책상에 앉아 가을이니 지금쯤 벼가 익었겠구나, 그렇게는 글이 안 나오죠.”

시청률에 따라 드라마의 수명이 몇 달 안에 결정되는 요즘, 농촌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17년을 장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이런 드라마와 함께 장수한 작가도 전무후무하다. 배경을 경기 김포, 인천 강화에서 진천으로 두 번이나 옮겼고 거쳐 간 연출자도 8명이 넘는다.

톱스타 고현정이 이 작품을 통해 탤런트로 데뷔했고 조민수, 조재현, 손현주, 노현희 등도 거쳐 갔다. 워낙 많은 연기자들이 출연해 초반에 아무개 남편으로 나왔던 연기자가 후반에 마을 손님으로 등장한 적도 있다.

그는 “드라마 제의를 받았을 때 실패가 뻔한 일이라 한 1년 정도 틀만 잡아주다 그만두려 했다”며 “하다 보니 우리 속에서 사라져 가는 윤리를 어떻게든 붙들어 매보자 하는 생각으로 17년을 버텼다”고 밝혔다. 이 드라마에서 남녀가 겸상을 하지 않고 실내에 들어올 때는 반드시 외투를 벗게 하는 등의 모습은 이런 이유에서다.

보수적이고 가부장적 장면들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는 “감각적이고 현대적인 드라마도 있지만 나 같은 드라마도 있다”며 “그래도 내가 너무 지나치진 않았나, 그런 틀을 확 뒤집어볼 필요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고 밝혔다.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는 그가 지은 제목. 드라마 집필을 제의받고 고민하던 중 창가에 서있는 말라빠진 대추나무를 보고 제목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렇게 지은 제목이 17년 동안 시청자들의 입에 오르내릴 줄을 상상도 못했다”며 “조만간 또 다른 작품으로 찾아뵙겠다”고 했다. 일흔을 넘긴 그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며 구체적인 나이는 밝히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진천=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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