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흔들리는 '드라마왕국', MBC

  • 입력 2000년 10월 5일 10시 16분


'드라마 왕국'을 자처해온 MBC의 아성에 금이 가고 있다. 최근 저녁 일일극, 수목 드라마 등 드라마 전반에서 예상 밖의 부진을 겪고 있던 MBC가 최후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월, 화 드라마에서도 KBS 2TV 미니시리즈에 뒤지는 '이변'이 일어났다.

방송 둘째 주부터 KBS 2TV <가을동화>에 밀리기 시작한 MBC <아줌마>는 급기야 이번 주에는 거의 '하프 스코어'에 가까운 큰 시청률 차로 뒤지는 수모를 당했다.

<국희> <허준> <뜨거운 것이 좋아>로 이어지는 MBC 월화 드라마는 다른 장르가 타사에 뒤질 때도 1위를 내준 적이 없는 철옹성. 그래서 MBC 월화 드라마의 몰락은 방송가에서도 큰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면 다른 드라마에서라도 분발을 해야 하건만, 상황은 기대와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 김민종, 류시원, 김하늘, 하지원, 김효진 등 '상품성' 높은 스타들을 동원한 수목 드라마 <비밀>은 당초 차태현 예지원이 출연하는 SBS <줄리엣의 남자>에 인적 구성 면에서 우세를 예상했었다.

하지만 지난 주 <비밀>은 19.6%로 25.1%의 <줄리엣의 남자>에 5.5%의 열세를 기록했다. 저녁 일일극은 KBS 1TV <좋은 걸 어떻게>가 30%대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MBC를 앞서고 있다.

그나마 주말극 <사랑은 아무나 하나>가 KBS 2TV <태양은 가득히>에 앞서고 있는 것이 위안거리. 하지만 <태양은 가득히>가 최근 시작한 주말극인 것을 감안하면 그리 즐거워할 형편도 아니다.

갑작스런 MBC 드라마의 연쇄 부진. 방송가의 드라마 PD들은 이 현상을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주기설. 드라마의 시청률은 일정한 주기를 타고 상승세와 하강세를 반복하는데, 지금은 MBC 드라마가 상승곡선을 꺽고 하강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 2년 가까이 드라마에서 부진을 보였던 KBS가 <태조왕건>을 발판으로 눈에 띄게 회복세를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그동안 시청률 우세를 지켜오던 MBC가 조금 안이한 기획으로 맞섰다는 지적도 한다. 타사의 한 드라마 PD는 "방송 시청률에 일정한 주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에 MBC가 보여준 드라마 기획은 이전의 <국희>나 <허준>과는 달리 뚜렷한 특색이나 '셀링 포인트(selling point)'를 찾을 수가 없다. 어차피 올 하강세이지만 스스로 재촉한 면이 더 크다"고 지적한다.

출생의 비밀, 신분상승의 욕구, 삼각관계 등의 흥행요소를 갖춘 <비밀>은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큰 드라마. 연기자 캐스팅이나 복잡한 애정관계, 미스테리를 연상케 하는 사건 등 <비밀>의 극적 장치는 그동안 MBC가 히트 드라마에서 즐겨 써온 단골메뉴들이다.

하지만 신선한 흥미거리 없이 전부터 여러 차례 사용해온 소재와 틀에 박힌 캐릭터들은 '섬싱 뉴'를 찾는 시청자들의 욕구에는 역부족이었다. 차라리 극적 사실성은 떨어져도 철저하게 만화적인 캐릭터와 차태현의 '개인기'에 비중을 둔 <줄리엣의 남자>가 시청자들의 입맛에는 더 들어맞을 수 밖에 없다.

KBS 드라마제작국에서도 '좋은 기획'이라고 호평을 했던 <아줌마>의 부진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오후 10시대 드라마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은 삶의 아기자기한 모습에 천착한 리얼리티 넘친 '드라마'보다는, 현실감은 떨어지더라도 재미있고 뭔가 관심을 끌 수 있는 '이야기거리'라는 것.

그렇다면 시청자들의 인식부족이나 수준이 문제일텐데, 이에 대한 한 PD의 지적은 의미심장한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그런 시청자의 입맛을 만든 것은 역설적으로 MBC의 히트 미니 시리즈이다. 현실보다는 만화같은 화려한 이야기 구조의 드라마에 시청자들의 취향을 길들여놓고 이제와서 갑자기 인생의 진지한 모습에 눈길을 돌리라는 것 자체가 어쩌면 넌센스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oldfie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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