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기획:히로시마 애니 축제]

  • 입력 2000년 8월 26일 10시 46분


어제에 이어 역시 한낮에 최고 35도를 기록한 무더운 날씨. 페스티벌 둘째 날인 이날 눈길을 끈 것은 오전 프로그램인 러시아를 소재로 한 두 편의 작품이었다.

상업 애니메이션 분야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순수 애니메이션에서 러시아는 아직도 강대국 대접을 받는다.

물론 러시아도 한때는 애니메이션이 산업적으로 융성했다. 소련으로 불리던 시절에는 뛰어난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미국 일본 못지 않은 제작물량을 자랑했다.

유명한 소유즈멀트 필름도 바로 이 때가 전성기였으나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이후 소련의 애니메이션 산업은 일단 자본력에서 서구 국가들과 경쟁이 안되고 있다. 하지만 자본보다 '비교적' 작가의 창의력을 더 평가하는 순수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는 좋은 작가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다.

이날 오전 상영된 두 편의 작품은 <옵티무스 문더스>와 페도르 키트룩의 작품세계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천재의 혼>. 99년작 <옵티무스 문더스>는 모스크바시 탄생 850주년을 맞아 단편 애니메이션 작가 50인이 공동제작한 56분짜리 옴니버스 작품이다.

제목 '옵티무스 문더스'는 라틴어로 '전세계의 최고'라는 의미. 참여한 50인의 이름 중에는 빌 플림턴, 조지 슈비츠게벨, 사라 와트, 모니카 르노 등 러시아가 아닌 다른 나라의 쟁쟁한 작가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몽고, 타타르, 나폴레옹, 히틀러에 이르는 수많은 침략을 이겨낸 수난의 역사에서 레닌과 스탈린 치하를 대담하게 묘사한 이야기들, 마피아가 득세를 하고 있는 오늘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모스크바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거대한 역사의 틈에 숨어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조명했다.

특히 50명의 작가가 저마다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력으로 이야기를 펼쳐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온갖 기법을 한편으로 모두 감상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이다.

이번 히로시마 페스티벌 명예위원장에 위촉된 페도르 키트룩은 러시아 애니메이션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인물. 1917년에 태어나 37년부터 소유즈멀트필름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하면서 112편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했고, 61년 <범죄의 역사>로 감독 데뷔를 한 뒤에는 83년까지 16편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특히 56년부터는 애니메이션 학교와 학회를 통해 후진 양성에도 힘쓴 살아있는 거장.

독일의 오토 알더가 제작한 키트룩의 다큐멘터리는 그런 그의 발자취를 조명하면서 한 길만을 걸어온 선배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담은 일종의 헌정 작품이었다. 하지만 키트룩의 작품 자체가 일반인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아 관객의 반응은 그다지 뜨겁지 않았다.

지난 7회 페스티벌 때 명예위원장을 맡은 래이 해리하우젠이 직접 히로시마를 방문한 것과는 달리, 키트룩은 영상 메시지만을 보내 페스티벌 주최측의 깍듯한 예우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대강당에서 러시아 특별전이 상영되는 동안, 소강당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된 빌 플림턴의 장편 <나는 낯선 사람과 결혼했다>가 상영됐다. 이번 페스티벌의 경쟁부문 심사위원중 한 명이 빌 플림턴이어서 특별히 그의 작품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것.

◀ 빌 플림턴의 금년도 최신작 <예수와는 드랙 레이스를 할 수 없다>

작가가 직접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보너스 상영으로 금년에 만든 최신작 <예수와는 드랙 레이스를 할 수 없다>까지 볼 수 있어, 비교적 한산했던 러시아 특별전과는 달리 아침 9시에 시작한 상영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으로 북적거렸다.

오후에는 키트룩의 특별작품전과 터키 애니메이션 특집이 각각 대강당과 소강당으로 나뉘어 열렸다. 평일 낮이고, 프로그램 자체가 대중적이지 않아서 그런지 관객들은 전날에 비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지난 대회보다 관객이 증가해 조직위 사무국 자원봉사자들의 표정이 무척 밝았다.

◀ '애니메이션 거리'로 명명된 행사장 앞 길

국내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터키 애니메이션은 작품의 수준과는 상관없이 제3세계 국가의 경향을 알 수 있는 자리였다. 매 회 베트남, 오스트리아, 인도, 태국 등 쉽게 접할 수 없는 국가들의 애니메이션 특집을 마련했던 히로시마 페스티벌측은 이번에도 터키 애니메이션 특집을 무려 5시간이나 마련해 '제 3세계'에 대한 자신들의 애정을 보여주었다.

어제에 이어 오후 6시30분부터는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인 경쟁부문 상영이 있었다. 역시 1천석이 넘는 대강당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차 오전의 한산한 분위기와는 대조를 이루었다. 지난 6회 때도 참가했던 이고르 코발료프는 <날으는 난센>이라는 유니크한 작품으로 4년 만에 히로시마를 다시 찾았다.

▲시적인 영상이 매력적인 <날으는 난센>▲현대인의 대화단절에 대한 경쾌한 풍자 <침묵유지>

▲탁월한 기술력이 돋보인 <퍼먼트>▲평이한 그림과는 달리 난해한 내용으로 화제가 된 <당근들의 밤>

▲그로데스크한 사랑이야기 <비올라>▲쥐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 <집을 산 한 남자의 하루>

<이온 플럭스>를 만든 피터 정은 그를 가리켜 "미국 작가중 화면의 시적인 아름다움이 가장 탁월한 작가"라고 극찬한 바 있는데, 이번 작품도 미적 감각이 넘치는 화면과 전형적인 스토리 텔링을 무시하는 작가 특유의 화법이 묘한 서정성을 자아냈다.

장 뤽 그레코의 <침묵 유지>는 현대인의 대화단절을 버스안에서 벌어진 해프닝으로 산뜻하게 묘사해 눈길을 끌었다. 영국의 소피아 린치는 연인간의 사랑을 소재로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연상시키는 <상승과 하락>을 내놓았는데, 모눈종이의 눈금이 선명하게 살아있는 화면에서 마치 낙서를 한 듯 자유분방한 그림체가 돋보였다.

영국 작가 팀 맥밀란의 <퍼먼트(Ferment)>는 만약 테크닉 분야의 상이 있었다면 당연히 수상해야할 정도로 기술적인 완성도가 뛰어났다. 초고속 촬영과 픽실레이션, 회전 카메라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현대 도시의 일상을 묘사했는데, '어떻게 저 장면을 촬영했을까'가 의아할 만큼 탁월한 영상구성이 압권이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날 상영에서 가장 화제가 된 작품은 28분 42초의 '장편'인 <당근들의 밤>. 에스토니아 작가 프리트 파른이 만든 이 작품은 웬만한 미국 B급 영화의 제작비 정도는 들어갔을 화려한 화면과는 달리 난해한 메시지와 복잡한 스토리 전개로 상영 내내 관객들의 입에서 한숨이 나오게 만든 '문제작'이었다.

◀ <아빠하고 나하고>로 경쟁 부문에 참가한 한국의 '7인조'

한편 이날 경쟁부문에는 계원조형예술대 출신의 작가팀 '7인조'가 만든 <아빠하고 나하고>가 상영됐다. 국내에서는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과연 히로시마의 관객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궁금했다.

가정내 근친 성폭력을 다룬 이 작품은 성에 대한 담론이 개방적인 일본의 관객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겨 상영후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경쟁부문에 참여한 캐나다 작가 레나 고비는 상영이 끝난 후 '7인조'를 찾아와 "감명을 받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아 한국 관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히로시마=김재범 <동아닷컴 기자> oldfie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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