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장 탈출’ 러시…국내 주식 거래 3년만에 반토막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2월 7일 03시 00분


美 등 투자는 작년만 39% 껑충

“미국 증시는 인공지능(AI) 투자 백화점입니다. 현시점에 이익을 내면서 미래 전망까지 높은 기업이 널려 있습니다.”

직장인 이모 씨(42)는 2023년부터 미국 증시에 올인했다. AI 칩 기업 엔비디아로 시작해 지금은 클라우드 기업 오라클, 방산 AI 팔란티어로 투자 범위를 넓혔다.

한국 경제에 대한 비관론 속에 국내 투자자의 ‘국장 탈출’ 행렬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6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현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투자자의 미국 등 해외 주식 거래 규모(매수·매도 합산)는 1564억1900만 주로 2023년(1124억3500만 주) 대비 39.1% 증가했다. 반면 국내 주식 거래 규모는 6352억5400만 주로 같은 기간 13%가량 쪼그라들었다. 2021년(1조2283억4200만 주)과 비교할 땐 반 토막이 났다.

미 증시가 새로운 혁신 기업의 등장으로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반면에 코스피는 정부 주도의 밸류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에도 지난해 9.6% 내리는 등 부진하자 투자자들이 대거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기업들의 혁신 격차가 증시의 경쟁력을 갈랐다고 평가한다. 본보가 한국경제인협회로부터 받은 2016∼2024년 한미 증시 시가총액 자료를 분석한 결과 엔비디아 등 미국 정보기술(IT) 10대 기업의 시총 합계가 5.6배로 불어나는 동안, 한국 IT 10대 기업은 33.8% 늘어나는 데 그쳤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투자자들의 이탈이 이어질 경우 국내 증시는 고사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밸류업 못믿어” 국장 탈출… 美 증시서 테슬라-팔란티어 샀다


美 기업들 높은 성장성 기대감
지난달 순매수액 6조원 육박
“혁신 기업-비즈니스 모델 안보여”
국내 주식거래 1년새 13% 급감
“막둥이 출생 이후 한국과 미국 증시에 나눠서 10년간 투자했는데, 수익률이 한국 증시는 ―30%, 미국 증시는 140%였습니다. 그동안 국내 증시에서만 투자했는데 수익률을 확인하고서는 미국 투자 비중을 확 늘렸습니다”

직장인 김모 씨(51)는 인공지능(AI) 관련 개별 주식을 비롯해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상장지수펀드(ETF), 리츠(REITs·부동산투자회사) ETF 등에 투자 중이다. 김 씨는 “AI의 본토가 미국인 만큼, 미국 증시 투자는 당연하다”라며 “한국 증시에는 성장 사업이 안 보인다. 국내 증시에 투자할 생각이 당분간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최근 들어서는 2030세대는 물론이고 세금과 환율 때문에 미국 증시 투자를 꺼리던 중장년층의 ‘영 올드(Young Old)’ 고액 자산가들도 고수익을 좇아 미국 증시로 옮겨가고 있다. 국내 유명 자산관리전문가(PB)는 “고액자산가들도 비상계엄 이후 환율이 치솟자 미국 증시에 대한 포트폴리오 비중을 확대하는 추세”라고 귀띔했다.

● 트럼프 효과에 지난달 美 증시 순매수액 40억 달러 넘겨

6일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달 국내 투자자들의 미국 증시 순매수액은 40억7841만 달러(약 5조9059억 원)에 달했다. 2021년 1월(45억3227만 달러) 이후 4년 만에 처음으로 순매수액이 40억 달러를 넘어섰다.

장기 부진에 빠진 국내 증시 대비 미국 증시의 투자 매력이 높은 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을 기점으로 달러화 강세 기조까지 강화되면서 미국 증시에 베팅하는 국내 투자자들이 더 늘어나는 추세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에 따른 미국 중심주의 강화와 대규모 감세로 미국 기업 실적이 상승할 것이란 기대도 높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트럼프 1기 당시에도 대규모 감세 등으로 미 증시가 크게 상승했다”며 “미국 기업의 수익성과 성장성에 대한 기대감이 크기 때문에 당분간 미 증시 상승이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증시에서 양자컴퓨터 대장주로 꼽히는 아이온큐의 경우 국내 투자자들의 투자액이 4일 기준 전체 시가총액의 30.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테슬라 투자액도 236억2668만 달러(약 34조2326억 원)로 전체 1.87%에 달한다. 이는 지난해 3분기(7∼9월) 기준 국민연금이 보유한 테슬라 지분(1.31%)보다 많은 수준이다.

● 韓 증시 활력 줄 ‘혁신스타’ 안 보인다

정부가 국내 증시 체질 개선을 위해 지난해 1월 ‘밸류업(기업 가치 제고) 프로그램’을 발표했지만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김수현 법무법인 광장 연구위원은 “일본 증시가 활황세에 접어든 건 10년 전부터 추진한 거래소 개혁, 중앙은행의 주식 매입, 저금리 정책 등 다양한 요인들의 합산물이지만 한국의 밸류업 정책에는 단기적 대책만 담겨 있다”고 지적했다.

근본적인 원인은 혁신 기업 기근이 꼽힌다. 미국에서는 AI칩의 선두주자인 엔비디아, 글로벌 스트리밍 시장의 새로운 시대를 연 넷플릭스, 기업의 고객관리 및 마케팅의 혁신을 가져온 세일즈포스 등 새로운 ‘신흥 강자’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전통(레거시) 기업들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찾아 혁신에 성공해 기업 가치를 끌어올리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2014년 사티아 나델라 취임 후 클라우드를 새로운 먹거리로 삼아 체질 변화에 성공했다. 최근 주가가 급등한 브로드컴 역시 데이터 처리를 돕는 네트워킹 반도체 등에서 새 먹거리를 찾으며 주목받고 있다.

반면 우리 시총 상위 기업들은 수십 년째 삼성, SK, LG 등 대기업 계열사로, 새로운 혁신 기업이나 비즈니스 모델이 출현하지 않고 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상장사들이 미국 나스닥 기업에 비해 혁신 의지가 약하다”며 “상장사들의 의지도 필요하지만 이들의 성장을 이끌기 위한 정부의 추가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내 증시#장기 부진#달러화 강세#미국 증시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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