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전북 군산시 소룡동 삼원중공업 작업장에서 1000t급 선박 2척이 마무리 건조작업을 기다리고 있다. 군산=김철중 기자 tnf@donga.com
7일 오후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 아이에스아이티. 사옥 1층에 있는 장비 조립실은 몇 개월째 텅 비어 있다. 선진국의 경기악화로 올해 초 주문이 줄기 시작하더니 하반기에는 주문이 거의 끊겼다. 작년 25억 원이던 매출이 올해 12억 원으로 절반 이하로 줄었다. 자금난으로 10월에 조립라인 직원 8명 중 4명을 해고했다. 이 회사 김병춘 사장은 “2003년 회사를 차린 뒤 이렇게 힘든 적이 없었다”며 “장비업체들은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모두가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한국 경제의 주력 산업이 부진에 빠지면서 금융당국이 반도체 디스플레이 항공 조선 건설 해운 등 6개 업종을 ‘위기취약업종’으로 선정한 뒤 밀착 모니터링에 들어갔다. 일부 기업의 경영악화가 ‘부실여신 증가→다른 기업에 대한 신규 여신 심사 강화 및 여신 회수→중소기업의 자금난 악화→경기 침체 가속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 선제적 대응에 나선 것이다. 동아일보가 실제로 이들 산업 현장을 돌아보니 상황은 감독당국이 우려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했다.
○ ‘일감 끊기면 바람에 날리는 풀 신세’
7일 오전 전북 군산시 소룡동에 위치한 삼원중공업 작업장에선 1000t 규모의 어업지도선(불법어업 단속용 배) 2척이 건조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조선소는 바쁘게 가동 중이었지만 한창범 대표(55)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그는 “관공서가 발주하는 배를 주로 만드는데, 내년에는 발주량이 40% 정도 감소할 것 같다”고 했다. 이 업체는 중소 조선소들이 하기 힘든 알루미늄 용접 기술을 보유해 올해 20척의 수주 실적을 냈지만 다른 조선소의 사정은 훨씬 어렵다. 한 대표는 “우리와 같은 매출 규모의 조선소 10여 곳 중에서 현재 살아남은 곳은 2곳뿐”이라며 “올해 하반기에 1척도 수주하지 못한 곳이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그는 “중소업체는 수주가 끊기면 바람에 풀 날리듯 사라진다”고 했다.
수도권 공단에서 디스플레이 부품을 생산하는 B사는 2008년 금융위기 직후에도 순이익을 낼 정도로 알짜 회사였지만 올해는 대기업의 시설 투자가 줄어 적자를 면하기 어렵게 됐다. 수주 자체가 줄어든 데다 이미 납품한 물품대금 가운데 10% 정도를 회수하지 못하는 등 사업 여건이 극도로 나빠졌다. 이 회사 관계자는 “내년에 설비 투자가 좀 늘어난다고 해도 장비업체들이 벌떼처럼 몰려 저가 수주를 하면 이익을 내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건설 분야는 위기가 가중되고 있다. 현재 시공능력평가 기준 100대 건설사 가운데 24곳이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가 진행되고 있다.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부터 3년 동안 채권단의 신용위험평가 결과, 구조조정 대상인 C, D등급을 받은 건설사가 60곳이 넘는데 이 중 상당수가 중대형 건설사였다.
○ “글로벌 시장 기침에 독감 걸릴 것”
동아일보 경제부가 금융감독원이 모니터링하는 6대 취약업종과 관련해 국내 신용평가사와 증권사에 위기의 원인을 물어본 결과, ‘공급과잉과 글로벌 경기위축’이 핵심 원인이라는 진단이 돌아왔다. 우선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업종은 세계적으로 반도체 D램과 낸드플래시메모리 재고가 과도하게 누적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수출주도형 경제인 한국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 분야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D램 공급이 부족해질 것을 우려해 업체들이 앞다퉈 생산하면서 재고가 잔뜩 쌓여 있는 상태다. 여기에다 글로벌 시장 점유율 1위 업체인 HP의 PC 사업 철수로 D램 수요가 더 위축될 수밖에 없어 반도체 분야는 당분간 과거의 영화를 회복하기 힘들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경기가 위축된 상황인데도 미국의 가구당 액정표시장치(LCD) TV 보유대수가 2.2대를 넘어섰다는 뉴스는 디스플레이 업종 종사자들에게는 충격적이다. TV나 컴퓨터 모니터 등에 쓰이는 패널 가격이 하락세를 이어갈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42인치 크기의 LCD 패널 가격은 올해 초보다 16%나 떨어졌다.
건설업은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장이 여전히 골칫거리다. 분양이 안 돼 건설사가 무너지는 상황이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 조선과 해운업 분야에선 최근 몇 년간 세계적으로 선박 가격이 치솟을 것으로 보고 배 생산을 주문하는 투기적 수요가 기승을 부렸는데, 이런 가수요 때문에 지금 배가 넘쳐나고 있다. 바다에서 선박 공급이 과잉이라면 하늘에서는 항공기 공급 과잉이 문제다. 내년 대한항공은 14대의 항공기를 추가로 도입하고, 아시아나항공도 9대를 새로 들여올 예정이지만 고유가와 환율 급등, 지진 등 자연재해로 비행기 탑승률이 감소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한국무역협회는 올해 상반기에 항공기의 화물 수송량이 65만5000t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73만 t)보다 10.3% 감소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실물경기의 침체가 6대 업종을 중심으로 확산되면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으로선 ‘고난의 시기’가 길어질 수 있다”며 “위기의 징후가 나타나면 자금지원과 구조조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인천=신치영 기자 higgledy@donga.com 군산=김철중 기자 tn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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