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이 수입하는 액정표시장치(LCD) 부품은 이제 LCD가 아니라 ‘TV 부품’입니다. 5% 관세를 내세요.” 1년 전 LG디스플레이의 배재영 수출입지원팀장은 폴란드 관세당국으로부터 일방적 통보를 받았다. 지금까지 LCD는 ‘정보기술(IT) 기기’로 분류돼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무관세로 통관시켰다. 그런데 LG디스플레이가 LCD에 집적회로(IC)를 추가했으니 이를 ‘TV 부품’으로 간주해 세금을 물리겠다는 얘기였다.
억울했다. 배 팀장은 “TV에 버튼 하나 더 달았다고 TV를 TV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꼴”이라고 말했다. 가만히 있다가는 매년 500억 원의 세금을 내야 했다. 웬만한 중소기업의 1년 매출이었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도 없었다. 결국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정부에 매달려보기로 했다.
○ 선입견 뛰어넘은 민관 협력
배 팀장은 “처음에는 솔직히 정부에 도와 달라고 해봐야 제대로 얘기를 들어주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다”며 “500억 원을 떼일지 모른다는 절박함이 아니었다면 연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에서 수출입 업무만 10년 이상 담당해 온 베테랑 배 팀장이 공무원에게 도움을 청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외교통상부와 관세청은 배 팀장의 선입견과는 전혀 달리 움직였다. 요청을 받자마자 바로 “우리 기업이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글로벌 기준을 따랐는데 그것을 문제 삼는다면 국익보호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주말에 당장 만나자”고 했다.
담당 공무원들의 일 처리는 일사천리였다. 우선 주(駐)폴란드 한국대사관 관계자가 폴란드 재무부 관계자를 만나 “한국정부가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관세청은 곧바로 대응 논리를 준비하며 세계 각국 관세당국의 품목분류 사례를 수집했다. ‘본질이 달라지지 않은 제품에 성능 향상을 위해 부품을 추가했다고 해서 새로운 품목으로 분류할 수 없다’는 대응논리는 이렇게 해서 나왔다.
배 팀장은 “억울하고 급한 건 우리 회사인데 한국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었다”며 고마워했다.
○ 협상국 대표마저 감동하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국정부와 LG디스플레이의 반발이 거세지자 폴란드 정부는 지난해 말 이 문제를 유럽연합(EU) 관세위원회로 넘겼다. 일이 복잡해졌다. EU 관세위원회는 27개 회원국 관세위원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을 만나볼 시간조차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외교통상부 양동한 북미유럽통상과장이 아이디어를 냈다. 주요 9개국을 선정해 이들 국가의 관세위원을 집중 설득하자는 것이었다. 외교통상부가 9개국 현지 대사관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면담을 주선했다. 대사관 직원들은 면담 때마다 LG디스플레이 배 팀장과 함께했다.
양 과장은 이에 그치지 않고 장관급인 김종훈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에게 “친서를 써 달라”고 요청했다. 김 본부장도 기꺼이 폴란드 재무장관과 EU 조세 및 관세담당 집행위원에게 ‘양국 우호관계의 발전을 위해 사안이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친서를 보냈다.
결국 지난달 열린 EU 관세위원회 정기총회에서 LG디스플레이 LCD에 대한 무관세 품목분류가 유지됐다. 헝가리와 체코의 관세국장은 “민관이 이렇게 힘을 모아 각국 위원을 설득하러 돌아다니는 모습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배 팀장은 “대한민국 공무원, 정말 독하다”며 “주말도 잊고 빠르게 일하는 모습에 공무원을 다시 보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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