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문화센터는 상아탑으로 변신중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7월 9일 22시 29분


"'길가메시 서사시'의 후반부는 인간의 운명, 특히 죽음에 대해 고찰합니다. 인간 삶의 추함에 대해 묵묵히 응시하는 부분이지요." 지난 달 9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본점 문화센터 강의실. 현직 대학 교수인 강사가 기원전 2000년 경 바빌로니아에서 쓰여진 인류 최고(最古)의 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의 집필배경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자 수강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필기에 열중했다.

청강을 한 기자가 보기에도 웬만한 대학원 수업 못지않은 어려운 주제지만 주부가 대다수인 문화센터 회원들의 수강 열기는 취업을 앞둔 대학생 저리가라 할 정도로 진지하고 뜨거웠다.

●백화점에 부는 인문학 바람

최근 백화점 문화센터 강좌에 인문학 바람이 거세다. 노래, 요리, 공예 등 취미 중심에서 미학, 철학, 종교, 미술 등 인문학 강좌의 비중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강사진의 수준도 관련 분야를 전공한 현직 대학 교수나 외국인 전문가 등 대학교에 못지않은 깊이를 더했다. 현대백화점이 여름 학기에 소더비 인스트튜트의 런던 총괄 디렉터를 초빙해 개설한 미술 강좌에는 한국어 통역을 거쳐 강의를 들어야 하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수십 명이 수강 신청을 했을 정도다.

인문학 강좌의 강세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의 올 여름 학기 인문학 강좌는 총 90개로 5년 전 44개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인문학 강좌가 전체 강좌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30%에 육박한다. 신세계 아카데미(옛 문화센터)도 올 여름 인문학 강좌를 봄 학기 대비 15% 많이 개설했다. 아이파크백화점 문화센터는 올해 여름학기 인문학 강좌를 22개 개설해 지난해 3개에 비해 7배로 늘렸다. 아이파크백화점은 지난해 봄 학기에 외국 대학의 교수를 초청해 주부회원을 대상으로 철학 강연을 하는 '세계석학포럼'을 열기도 했다. 아이파크백화점 문화센터 최수민 실장은 "세계석학포럼에 대한 회원 반응이 뜨거웠다"며 "필기는 기본이고 동영상을 찍는 수강생도 있었다"고 말했다.

●대형마트 문화센터 강의와 차별화

문화센터를 아예 인문학 강좌에 맞게끔 개조하는 사례도 있다. 현대백화점은 올해 4월 본점 문화센터 기존 강의실에서 책걸상을 없애고 수강생이 강단 쪽으로 원형으로 둘러앉는 고대 그리스 학당 모양의 원형 계단형 강의실로 개조공사를 했다. 필기를 할 때 불편함을 덜기 위해 강의 때마다 수강생에게 노트를 올려놓을 수 있는 나무패널을 지급한다.

백화점 문화센터에 부는 인문학 바람은 최근 몇 년 새 대형마트들이 잇달아 문화센터를 개설하고 교양, 취미 위주의 강좌를 다수 개설하면서 촉발됐다. 대형마트 문화센터 강좌와 차별화될 수 있는 대안으로 인문학 강좌가 주목을 받은 것. 문화센터의 주요 고객인 중년 주부들의 인문학적 교양에 대한 갈증과 맞아떨어지면서 인문학 강좌는 당분간 인기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백화점 백성혜 문화센터장은 "예전엔 수강생 유치에 어려움을 겪어 폐강되던 실용성이 배제된 인문학 강좌에 요즘은 수강생이 꾸준히 늘고 있다"라며 "마트 문화센터와 차별화되는 강좌를 개발하기 위한 백화점 업계의 아이디어 경쟁도 치열하다"고 말했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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