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유동성 위기에 빠진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끝내 일부 계열사의 워크아웃에 동의했다. 30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산업은행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의 김영기 수석부행장(왼쪽)과 오남수 금호아시아나그룹 전략경영본부 사장이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홍진환 기자
금호아시아나그룹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이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에 대해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을 실시키로 한 것은 두 회사의 자본잠식을 그대로 뒀다가는 금호그룹이 위험해질 뿐 아니라 가까스로 회복세에 접어든 한국 경제에도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금호그룹 주력 계열사의 부실은 금호에 총 18조 원의 돈을 빌려준 금융권의 부실로 번질 수 있어 구조조정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경우 내년 한국 경제의 최대 위험요인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대우건설(2006년) 대한통운(2008년) 등을 공격적으로 인수해 재계 서열 11위에서 9위로 날아올랐던 금호그룹은 결국 ‘승자의 저주’(높은 가격으로 다른 기업을 인수했다가 차입금 상환 부담으로 기업 자체가 위험해지는 현상)에 휘말려 한쪽 날개가 꺾이게 됐다. ○ 금호산업-타이어 그룹에서 분리
채권단이 금호그룹의 6개 주력 계열사 가운데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에 대해서만 워크아웃을 하는 것은 대우건설 인수 당시 투자자들에게 약속한 투자수익 보장장치(풋백옵션)가 내년 초 예정대로 행사되면 이 두 회사가 자본잠식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금융권이 이 두 회사에 빌려준 대출금은 3조 원이고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장에 보증해준 금액까지 합친 총여신 규모는 8조4000억 원에 이른다. 자본잠식이 되면 이 돈을 돌려받기 힘들어져 그룹의 부실이 은행권을 거쳐 경제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
채권단은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가 워크아웃을 신청하면 전체회의를 열어 수용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채권단의 75% 이상이 동의하면 워크아웃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현재 채권단은 금호산업 등의 자산상태를 실사해 3개월 내에 경영정상화 약정을 체결한다는 계획이다. 이 약정에는 채권단이 2조∼3조 원 정도를 출자전환하고 기존 주주의 주식을 줄이는 감자(減資)를 실시해 두 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하는 방안이 포함된다. 사실상 금호그룹과의 인연을 끊게 되는 셈이다. 금호산업은 그룹의 모체인 고속버스와 건설업을 담당하는 주력 계열사로, 금호산업의 포기로 금호그룹은 자존심에도 큰 상처를 입게 됐다.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로선 워크아웃에 들어가면 채무가 동결되기 때문에 대출금 회수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고 긴급자금도 지원받을 수 있다.
○ 녹록지 않은 자율협약
이번에 채권단과 금호 측이 경영정상화 방안을 마련하면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대목은 금호석유화학과 아시아나항공에 대한 워크아웃 여부였다. 채권단은 그룹 차원의 구조조정을 진행하려면 금호석유화학 등 계열사 전체에 대한 워크아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지만 금호 측은 석유화학은 주력 사업부문인 데다 경영상태도 건실하다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자율협약은 이 대립의 절충점인 셈이다. 법적인 강제성이 없는 자율협약이지만 재무구조개선을 위한 자산 매각 등 구조조정은 강도 높게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일단 대한통운 등 주력 계열사를 추가 매각하지는 않기로 했지만 구조조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매각 대상으로 다시 거론될 여지가 여전히 남아 있다.
가장 덩치가 큰 계열사인 대우건설은 산업은행이 출자해서 만드는 사모펀드(PEF)를 통해 사들인다. 올해 중반 금호그룹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산은이 제시한 ‘PEF를 통한 대우건설 매입방안’에는 시가 수준에서 매입한 뒤 나중에 생기는 시세차익의 일부를 금호 측에 돌려주는 조건이 담겼지만 이번에는 주당 1만8000원 정도로 인수하는 조건 이외의 다른 부대조건은 없다. 주채권은행이 1만2000원대인 현 시세보다 높은 값에 인수하는 것에 특혜시비가 제기될 수 있다.
○ 오너 일가 사재 출연 규모 관심
금융당국은 금호그룹의 부실 경영에 따른 손실을 채권단이 상당 부분 떠안는 이번 경영정상화 방안이 시장에서 설득력을 얻으려면 박삼구 명예회장 등 금호그룹 총수 일가의 사재 출연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다. 채권단은 총수 일가가 금호석유화학 주식(48.5%) 등 보유 중인 계열사 주식이나 자산을 채권단에 담보로 넘겨 처분을 맡기는 방식으로 사재를 출연토록 할 계획이다.
하지만 총수 일가의 지분가치가 크지 않은 만큼 출연 규모는 예상보다 작을 것으로 보인다. 박 명예회장은 금호석유화학 지분 5.30%와 금호산업 지분 2.14%를 보유하고 있는데 주가가 최근 크게 떨어진 탓에 주식 가치가 380억 원 정도에 머물고 있다. 증권가에선 총수 일가의 지분을 모두 합쳐도 3000억 원이 안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총수 일가의 사재 출연뿐 아니라 비주력 계열사를 매각하는 방안도 지속적으로 추진된다. 금호그룹은 이날 금호렌터카 지분을 KT-MBK파트너스 컨소시엄에 전량 매각해 3000억 원을 확보했다.
금융위원회는 금융권이 금호그룹과 관련한 손실에 대비해 쌓아야 하는 대손충당금 규모가 총 1조7000억 원에 이를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규모의 대손충당금은 금융권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 금융당국의 평가지만 투자심리가 위축되는 등 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도 적지 않다. 김주현 금융위 사무처장은 “금호의 협력업체 등에 일시적인 자금난이 생길 수 있다”며 “보증기관이 특례보증을 서도록 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해 시장의 불안요인을 해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건설 위축… 화학-운송 양날개로 재편될 듯 ■ 사업부문 어떻게 바뀌나 합성고무 사업 세계 선두권 대한통운-아시아나 성장세 7, 8개 계열사 팔아 군살빼기▼
금호아시아나그룹 사업부문은 크게 화학·타이어, 건설, 운송·물류·서비스 등 3개로 구성돼 있다. 2008년 말 기준으로 각 사업부문 매출액 비중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번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에 대한 워크아웃 추진으로 건설사업 부문이 위축되면서, 금호그룹의 핵심 사업부문은 화학, 운송·물류·서비스를 중심으로 재편될 것으로 전망된다. 금호산업 내 건설부문 매출 비중이 전체의 90%에 가깝고, 대우건설은 산업은행이 인수하기 때문이다.
또 금호타이어가 2∼3년 전부터 추진해온 해외 진출도 이번 워크아웃으로 차질을 빚게 됐다. 이 회사는 2008년 중국과 베트남에 공장을 신설하고, 올 초에는 미국 뉴저지에 물류 거점을 확보하는 등 해외시장 개척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유동성 위기로 미국 공장 신축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렸다.
금호그룹이 희망을 걸고 있는 계열사는 금호석유화학, 대한통운, 아시아나항공 등 3개사 정도다. 금호석유화학이 영위하는 합성고무 사업은 생산규모면에서 세계 선두권이다. 오남수 금호아시아나 전략경영본부 사장은 “금호석화의 경우 지분법 평가손실로 간접적 영향이 있을 수 있지만 실적이나 전망이 좋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영업활동을 하는 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통운은 계열사 가운데 성장세가 가장 좋은 회사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액은 1조8283억 원으로 전년 대비 44.3% 급증했다. 대한통운의 택배, 항만물류 사업부문과 아시아나항공 등 다른 계열사와의 시너지 효과가 컸다. 대한항공과 함께 국내 양대 항공사로서 입지를 굳힌 아시아나항공은 향후 관광산업의 확대와 맞물려 성장이 기대되는 핵심 계열사다.
현재 금호는 주요 계열사 20여 개 가운데 자구책의 일환으로 7, 8개 계열사의 매각을 추진했는데, 이 중 금호렌터카, 서울고속터미널, 금호오토리스, 아시아나공항개발 등 4개사의 매각을 끝낸 상태다. 금호타이어 측은 “워크아웃 절차 개시가 고질적 문제인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금호 계열사들이 짊어진 무거운 부채가 재기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많다.
한 증권사의 금호 담당 애널리스트는 “대한통운 등 괜찮은 계열사들도 있지만 부채가 이들의 발목을 잡을 수 있고, 새로운 성장 동력이 눈에 띄지 않는 점 등은 금호가 재기를 위해 넘어야 할 과제”라고 진단했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살 사람 적은데 비싸게 내놔 ‘예고된 무산’▼ ■ 대우건설 매각실패 왜?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유동성 문제 해결을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대우건설 매각이 끝내 무산된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대형 건설사 인수에 나설 만한 회사나 자본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높은 값에 팔려 했기 때문에 빚어진 필연적 결과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30일 ‘금호그룹 정상화 방안’ 자료에서 “국제적 금융위기에 따른 경기 부진으로 자구계획 대상 물건의 매각이 지연됐고 그 결과 대우건설 매각도 사실상 무산됐다”고 밝혔다. 매각작업에 참여한 외국계 금융회사의 고위 관계자는 “8월 대우건설 입찰 안내문을 국내외 투자자들에게 발송했을 때 관심을 보이는 곳이 거의 없어 거래가 힘들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며 “그나마 대우건설에 관심을 보였던 한 외국계 대형 건설사는 ‘주당 2만 원대의 입찰가를 써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입찰의사를 철회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산업은행이 인수 자격으로 중요하게 여긴 ‘경영능력과 진정성’을 갖춘 투자자를 찾기는 더 힘이 들었다. 이에 따라 금호그룹은 매각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지난달 23일 이례적으로 자베즈파트너스와 TR아메리카컨소시엄 두 곳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 하지만 이들은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이후에도 투자확약서 제출을 미루는 등 진정성을 보여주지 않았다.
대우건설 임직원들은 자베즈파트너스 등 외국계 자본에 경영권이 넘어가지 않고 은행권의 관리를 받게 된 것을 내심 환영하는 분위기다. 현대건설이 채권단 공동관리를 받으면서 기업 가치가 높아진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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