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닥서 뺨맞고 회계사에 화풀이

  • 입력 2009년 4월 10일 02시 55분


■ 퇴출위기 업체 소란-행패 빈발

“감사 거부 등 부정적 의견에

사무실서 소동-가족협박까지

“제도적 보호 필요” 여론비등

“자녀들이 ○○학교 ○학년이지요?”

지난달 30일 서울 강남의 A회계법인 사무실. 감사보고서 마감을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박모 회계사에게 낯선 방문객은 한 장의 명함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명함에는 박 회계사가 현재 감사 중인 회사의 ○○과장이라는 직함이 찍혀 있었다. 협박임을 직감했다. 박 씨는 “상장 폐지 요건이 되는 감사거부 의견을 내려던 판단이 한순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경기침체로 코스닥 상장회사들이 대거 상장 폐지 위기에 처하면서 회계사들에게 ‘불똥’이 튀고 있다. 퇴출 위기에 몰린 코스닥 상장회사의 일부 직원과 투자자들이 회계법인 사무실로 찾아가 소동을 벌이거나 담당 회계사를 협박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 회계사들의 수난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H회계법인에서는 경찰과 코스닥 상장회사 직원 간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피감사인인 상장회사 직원들이 술을 먹고 회의실을 점거하자 경찰이 출동한 것. H법인 대표는 “상장회사 직원들이 감사보고서 내용에 불만을 품고는 폭력배까지 동원해 전화와 문자로 협박을 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예전에도 감사보고서 제출을 앞두고 소액주주나 회사 관계자들이 담당 회계사의 휴대전화 번호나 사진을 인터넷 카페에 공개하고 “항의전화를 하라”며 부추기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경기침체로 재무구조가 크게 악화된 코스닥 회사가 늘어나면서 회계사들에 대한 협박이 도를 넘고 있다.

한국거래소 자료에 따르면 경영부실 등의 이유로 상장폐지 위기에 처한 코스닥 상장사는 모두 64곳에 이른다. 코스닥 상장사 전체의 7%가 넘는 규모로 1996년 코스닥시장 개설 이후 최대다. 한국공인회계사회 박영필 부장은 “상장 폐지가 되면 투자금이 손실날 것을 우려한 투자자까지 가세해 협박하는 바람에 회계법인 대표와 담당 회계사의 가족들이 호텔로 피신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 회계사 감사권한 보호할 장치는 없어

현행 한국거래소 상장 규정에 따르면 감사인인 회계법인이 감사의견 거절을 내면 거래소는 상장 폐지를 검토하게 된다. 이런 내용이 공시되면 주가도 급락한다. 투자자들은 물론 회사 관계자들도 회계사들의 판단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한 회계법인 대표는 “코스피 상장기업에 비해 코스닥 상장회사들이 유독 회계법인의 감사에 불만을 품고 협박을 서슴지 않는 것은 일부 회사가 사채업자 등과 연관돼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코스닥상장법인협의회 김재찬 상근부회장은 “코스닥 기업과 회계법인 간의 의견이 다른 과정에서 일부 마찰이 생긴 것일 수는 있지만 일부 회사에 한정된 문제”라고 반박했다.

상장사의 거친 항의와 협박이 알게 모르게 회계사들의 감사 결과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점도 문제다. 익명을 요구한 한 회계사는 “투자자들과 회사 직원들이 집요하게 협박하면 감사보고서에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게 부담스러워질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회계사들의 감사 권한을 보호해 줄 만한 제도적인 장치가 없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올해 들어 관련 민원이 늘어나 마냥 방치해 둘 수 없다는 공감대는 형성됐다”며 “전반적인 문제점을 파악해서 제도 개선이 필요한지를 검토해 보겠다”고 밝혔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