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골 한국경제’ 옐로카드 쏟아진다

  • 입력 2007년 3월 12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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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급을 둘러싼 현대자동차 노사 갈등이 극심했던 올해 1월 현대차 울산공장 수출 전용 부두 야적장. 평소 같으면 수출용 자동차로 가득 차 있을 공간이 텅 비어 있었다. 한국 경제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다. 울산=연합뉴스
성과급을 둘러싼 현대자동차 노사 갈등이 극심했던 올해 1월 현대차 울산공장 수출 전용 부두 야적장. 평소 같으면 수출용 자동차로 가득 차 있을 공간이 텅 비어 있었다. 한국 경제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다. 울산=연합뉴스
한국 경제의 위기를 지적하는 경고가 잇따라 쏟아지고 있다.

현 정부 들어 악화되는 경제상황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았지만 최근 대기업 총수, 전직 경제장관, 경제연구소, 금융계 등 각계에서 하루가 다르게 나오는 위기론은 내용과 강도(强度)에서 그냥 흘려듣기에는 심상찮은 수준이다.

특히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정신 차리지 않으면 삼성전자는 물론 우리나라도 4∼6년 뒤에는 아주 혼란스러운 상황이 올 것”이라고 말한 것을 비롯해 기업경영에 직접 관여하는 재계 핵심 인사들의 잇따른 경고는 한국 경제 위기가 점차 구체적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냐는 의미를 담고 있어 주목된다.

본보 10일자 1·4면 참조
▶이건희 회장 “4~6년뒤 혼란 우려”…한국경제에 경고
▶이건희 “심각하다… 삼성만이 아닌 나라 전체의 문제”

○ 이건희 회장-박태준 명예회장 발언 큰 파장

삼성 이 회장이 9일 기자들과 만나 밝힌 삼성과 우리 경제에 대한 우려는 ‘메가톤급 충격’으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경제계에서는 한국에서 삼성이 차지하는 위상과 막강한 정보력을 감안할 때 한국 기업들이 직면한 대내외 상황이 ‘위험수위’에 육박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삼성 내부에선 구조조정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계열사 단위로 사업을 축소하거나 인력을 감축할 것이라는 말도 흘러나오고 있다.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도 같은 날 현대차 주주총회 때 발표한 영업보고서에서 “세계 자동차시장은 선진업체의 견제와 후발업체의 추격으로 경쟁이 더욱 격화될 것”이라며 위기의식을 강조했다.

이미 재계에서는 경제 위기론에 대한 공감대가 적지 않았다. 특히 ‘한국 철강산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지난해 말 본보와의 단독인터뷰에서 “한국 경제가 활력을 잃은 채 드러누워 있다”고 지적한 것은 큰 영향을 미쳤다.

최고경영자(CEO)들의 걱정은 대부분의 주요 업종에서 감지된다.

이구택 포스코 회장은 올해 초 신년사에서 “경쟁과 관련한 패러다임 변화속도가 과거에 비해 한층 빨라지고 있으며, 국내 경기침체와 환율 상승 등 수많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지난달 “무한경쟁시대에 한국 경제는 저성장에 허덕이고 있다”며 “한국 기업들이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도약하려면 창조적 리더십 확보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강정원 국민은행장 역시 작년 12월 본보 인터뷰에서 ‘제2금융권발(發) 금융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하는 등 산업계뿐만 아니라 금융계의 우려도 적지 않다.

○ “외환위기 이후 가장 심각”

전직 경제장관들도 한국 경제가 처한 위기에 대해 경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조순 전 경제부총리는 지난달 7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국제경영원 주최 신춘포럼에서“정부와 기업, 근로자 등 모든 경제주체가 각기 방향을 잃어 경제가 외환위기 이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다”면서 “한국호(號)는 망망대해에서 진로를 잃고 헤매고 있다”고 진단했다.

진념 전 경제부총리도 1월 13일 한 조찬세미나에서 “한국은 지난 10년간 선진국 문턱에서 주춤거리고 있다”며 “현재 한국 경제는 비전과 자신감을 상실하고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고 했다.

재무부 장관 출신인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1월 18일 한 세미나에서 “우리나라는 유연하지 못한 노동시장, 변하지 않는 정부 규제, 갈수록 커지는 사회복지 부담 등으로 경제가 활력을 잃는 ‘독일병’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민간 경제연구소의 보고서도 잇달아 나오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은 11일 ‘일본 잃어버린 10년의 교훈’ 보고서를 통해 “한국 경제가 일본의 부동산 거품이 붕괴된 1990년대 일본 경제와 닮은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달 ‘통상대국 한국의 위상과 진로’ 보고서에서 “한국은 의류, MP3 플레이어 등 일부 분야의 산업경쟁력을 중국에 이미 추월당했고 2010년엔 이동통신장비, 디지털TV, 철강 경쟁력도 중국에 역전당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 기존 주력 산업마저 경쟁력 잃어

현 정부 고위 인사들은 “경제의 기초를 튼튼히 다져 왔기 때문에 차기 정권부터 혜택을 볼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관변(官邊) 이코노미스트를 제외하고 정부의 이런 낙관적 분석에 동의하는 전문가를 찾기는 쉽지 않다.

한국 경제는 지금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할 뿐 아니라 기존 주력 산업마저 경쟁력을 잃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1월 국내기업 286곳을 대상으로 신규사업 추진 현황을 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53.5%)이 ‘3년 후 미래 수익원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경희대 안재욱(경제학) 교수는 “현 정부가 시장경제 원리의 핵심인 사유재산을 침해할 소지가 있는 정책들을 쏟아내 경제의 기초체력이 약해진 것이 핵심적 원인”이라며 “실업자에 대한 보조금 지급 같은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적 정책보다는 노사관계, 세제(稅制), 경제규제 등과 관련한 큰 정책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신치영 기자 higgledy@donga.com

김창원 기자 cha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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