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한준]‘불신의 늪’에 빠진 한국호

  • 입력 2006년 12월 29일 03시 00분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최근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 국민이 서로 믿지 못할 뿐 아니라 특히 정부나 정치권을 가장 안 믿는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 신뢰가 고갈되어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비슷한 조사 결과들이 있었다. 올해 초에는 대통령의 지시로 대통령수석비서관 및 보좌관 회의에서 미국의 정치학자 조지프 나이의 ‘국민은 왜 정부를 믿지 않는가’를 읽고 토론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신뢰 없이는 사회발전 힘드는데

이제 우리는 단지 우리 사회에 신뢰가 부족하고 불신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기보다 불신이 우리 사회의 고질병 혹은 불치의 병이 아닌가 고민해 볼 때가 되었다. 한국 사회는 가까운 가족, 친지, 연줄로 묶인 사람들을 많이 신뢰하는 반면 연줄로 묶이지 않은 낯선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를 중심으로 가족, 친지, 동료, 이웃, 낯선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거리가 멀어질수록 신뢰의 정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사람 간의 신뢰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고 도움을 주었을 때 다른 사람들도 나에게 그렇게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남을 돕는 선한 사람들만 사는 사회는 있을 수 없다. 그 때문에 협동이 잘되려면 서로 호의를 기대할 수 있는 신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가 낮을 뿐 아니라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있다. 낮은 수준의 폐쇄적 신뢰는 발전의 걸림돌이다. 잘 모르는 사람도 믿고 함께 일해야 할 경우가 많다. 서로 믿지 못하면 일을 함께 하기 힘들고 결국 자기 주변의 믿을 만한 사람과만 일을 하게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남이야 어떻게 되건 나와 내 주변사람들만 잘되면 된다는 경향이 늘어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불신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정부나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다. 정부나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태도는 못 믿는 정도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안 믿는 것에 가깝다. 정부에서 부동산 대책을 내놓을 테니 집 사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면 국민은 더욱 급하게 집을 구해서 집값이 솟구친다. 정부에서 교육 혁신을 해서 교육 환경을 좋게 만들겠다고 하면 국민은 더욱 불안해져서 자녀를 빨리 외국에 보내고자 한다. 정부에서 북한 핵이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 국민은 더욱 불안해한다. 이쯤 되면 사회의 기본 질서가 흔들린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전적으로 정부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신뢰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경험과 평가가 오래 쌓인 결과이다. 짧은 기간 국정 성과만을 탓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게다가 민주화와 함께 언론의 자유가 늘고 인터넷의 영향으로 정보 확산이 빨라지면서 정부나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정보가 크게 늘었다. 과거에는 묻혀 버렸을 많은 문제가 드러나면서 국민의 국정에 대한 평가가 그만큼 까다로워졌다.

책임 안 지는 정부 어찌 믿으라고

그렇지만 현 정부가 신뢰의 추락에 대한 주된 책임을 면할 길은 없다. 현 정부는 출범 당시 국민에게 많은 약속을 했다. 불균형 및 양극화의 해소와 사회 각 분야의 혁신을 통해 선진국이 되겠다는 당초의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다고 보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도 역사에 의해 심판받겠다던 대통령은 아직 끝나지도 않은 재임 기간 중의 성적표를 스스로 후하게 매기고, 잘못하거나 이루지 못한 것은 외부 환경 탓으로 돌리고 있다.

국민의 신뢰를 얻는 데 국정 성과의 우수함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국민이 나라를 걱정할 때 자화자찬과 자중지란을 보이는 정부와 정치권을 국민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한준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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