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거리 범죄’ 안된다]<下>식품 안전망 만들자

  • 입력 2004년 6월 13일 18시 43분


1997년 9월 미국산 소고기에서 맹독성 대장균인 ‘O157’(H7)이 검출되자 전국은 식중독 공포에 빠졌다. 당연히 수입 축산물의 허술한 검역 및 관리 실태가 도마 위에 올랐다. 농림부가 통관 검역 및 도축, 보건복지부가 유통 안전을 책임지는 이원 구조를 일원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당시 식품안전제도 개선 논의는 엉뚱하게도 관할 다툼으로 변했다. 농림부는 축산물 가공업무를 이관받으려 했고 복지부는 이에 극력 반대했다. 정부 내에서는 이 일을 계기로 업무 영역 및 기능 조정 등과 관련된 논의를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식품 관련 사고가 터질 때마다 국가의 식품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았지만 정부는 부실하고 분산된 기능을 유지하는 데 급급했다. 이제 ‘만두 파동’을 계기로 식품안전만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관련법규 정비 서둘러야=전문가들은 정부가 식품안전 관련법령 정비 등 단기 대책을 즉각 실천하면서 총체적인 식품안전관리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전문가들은 △부처간 식품안전업무 공조 강화 △식품위생법 등 문제점이 있는 각종 법령의 개정 등을 촉구하고 있다. ‘만두 파동’에서도 식품의약품안전청과 경찰청이 정보교환 등 업무 협조를 긴밀히 했다면 더 많은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불량 만두를 퇴출할 수 있었으리라는 지적이다.

우선 영업정지를 과징금(1일 매출액×영업정지기간)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한 식품위생법 65조가 빨리 개정돼야 한다. 이 조항은 업자들이 영업정지 처분을 받아도 과징금만 내면 계속 불량식품을 만들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1999년 식품제조업체를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고, 일정한 규모 이상의 업체는 식품 관련 전공자를 식품관리인으로 지정해 위생과 품질을 관리하도록 하는 규정이 사라졌다. 식품 관련 규제가 강화되는 세계적 추세와 맞지 않는다.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단속 및 감시 기능이 중앙정부에서 지방자치단체로 과도하게 이전됐다는 지적도 있다. 덕성여대 식품영양학과 정기화(鄭淇化) 교수는 “지방자치단체는 관내 식품제조업체와 친분 관계 때문에 강력한 단속을 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식품안전관리 일원화=식품 전문가들은 식품안전망의 기초를 놓기 위해 국가의 식품안전을 전담해 관리하는 통합기구 또는 위원회가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통합기구의 필요성은 불량식품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제기됐으나 현재 7개 부처에 흩어진 업무를 조정하는 어려움 때문에 유야무야됐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곽노성(郭魯聖) 책임연구원은 “우선 현재 국무조정실에서 운영 중인 ‘식품안전관리대책협의회’를 모태로 ‘식품안전관리위원회’를 설립하는 방안도 검토될 수 있다”며 “이 위원회가 식품업무를 조정하고 기준을 마련하는 등 지휘탑 역할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중앙대 이종영(李鍾永·법학) 교수는 “일기예보처럼 유해물질에 대한 소비자경보를 발령하도록 한 규정 등을 포함한 식품안전기본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시민단체들은 식품 기업들이 경각심을 가질 수 있도록 식품 관련 집단소송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식품 기업에 무거운 책임을 묻자는 취지다.

한편 선진국들은 다원화되고 분산된 식품안전관리시스템을 일원화 또는 통합하는 추세다. 농수축산물을 ‘생산→유통→소비’의 개별 단계로 관리할 경우 앞 단계에서 발생한 위험요소를 막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태훈기자 jefflee@donga.com

정원수기자 needjung@donga.com

▼외국의 식품안전관리▼

먹을거리로 장난치는 상혼은 선진국에도 있다. 그러나 소비자의 건강과 생명까지 위협하는 철면피 기업은 찾아보기 어렵다. 적발되는 순간, 해당 기업은 존망을 걱정할 만큼 엄청난 규모의 리콜을 해야 하고, 소비자들은 그 사실을 오래 기억하기 때문이다.

▽미국=불량식품이 발견되면 제조회사는 가혹할 정도의 리콜을 해야 한다. 1960년대 자동차에 대해 도입된 리콜 제도는 현재 모든 제조물품으로 확산돼 소비자보호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1997년 오하이오주의 허드슨사는 자사의 햄버거를 먹은 소비자 15명이 감염 증세를 보이자 1만1320t을 리콜한 뒤 파산했다. 2002년 10월에는 유명 식품업체 필그림스 프라이드 계열의 왬플러 푸드사가 공급한 가금류 식품이 리스테리아균에 오염됐을 가능성 때문에 1만2410t을 회수한 사례도 있다.

식품안전 담당 공무원들은 각종 측정도구를 갖고 다니며 대형업체는 물론 동네 빵집에 이르기까지 수시로 기습적인 방문 점검을 벌인다.

▽일본=일본 최대 육가공업체인 닛폰햄은 2002년 수입쇠고기 5.2t을 일본산으로 위장했다가 치명타를 입었다. 주부들의 불매운동은 물론 대형 슈퍼마켓과 백화점, 편의점까지 닛폰햄 제품을 진열대에서 치워 버렸다. 창업자가 물러나 회사 문을 닫는 사태는 면했지만 ‘소비자를 속인 기업’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지금도 고전하고 있다.

이보다 반년 전에는 수입쇠고기를 일본산으로 속여 팔려다 들통난 유키지루시식품이 도산했다.

무엇보다도 극성이다 싶을 정도로 까다로운 일본 국민의 위생의식 때문에 업체들이 장난을 치기 어렵다.

▽유럽=프랑스의 생선가게는 월요일에는 문을 닫는다. 일요일에 생선 수송 업무를 쉬기 때문에 월요일에 가게를 열려면 이틀 전(토요일) 생선을 납품받아야 하기 때문.

식재료의 신선도를 유지하려는 이 같은 노력 때문에 프랑스의 식품 안전도는 어느 나라 보다 높다. 기껏해야 주변국 포도주를 프랑스산으로 산지를 속여 팔려는 경우가 간혹 나타날 뿐이다. 요컨대 한국의 불량만두처럼 장기간 전국 규모로 불량식품이 유통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

주요 선진국 식품안전관리체계
국가식품정책수립 기관식품안전관리기관
영국식품기준청식품기준청
캐나다보건부식품검사청
호주호주·뉴질랜드 식품기준청호주 주정부 및 검역감시청
뉴질랜드뉴질랜드 식품안전청
덴마크수의식품청수의식품청
아일랜드식품안전청식품안전청
프랑스식품안전청은 유해성 평가 등 연구업무. 농업부 보건부 재경부 등 담당 부처별로 식품안전관리
미국식품위생 35개 법령을 12개 기관이 관리하지만 대통령 산하 식품안전위원회에서 공동 협력
유럽연합(EU)식품안전기준 권고 감시하는 유럽식품안전청 창설
일본총리실 산하 식품안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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