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情과 선물]크리스마스 케익 "신선한 재료가 열쇠"

  • 입력 2003년 12월 22일 16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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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간 케이크에 푹 빠진 일본인. 일본 최고의 제과학교 교수 자리를 버리고 한국인 부인을 따라나선 순정파. 오전 5시에 일어나 농산물 도매시장에서 그날 쓸 과일을 고르며 하루를 시작하는 일벌레. 돈보다 케이크를 더 좋아하는 남자….’

한국에서 4년째 케이크 전문점을 운영하는 일본인 에구치 마코토(江口誠·53). 그에게 케이크는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다.

케이크를 만들면서 머릿속에서 돈을 헤아릴 법도 하지만 그는 고객의 행복한 표정이 먼저 떠오른단다. 그런 그를 한국인 부인 문송숙씨(44)는 ‘바보 에구치’라고 부른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케이크는 어떤가요.” 4년 전 일본에서 건너와 ‘에구치 케이크’ 브랜드를 만든 에구치 마코토(江口誠·왼쪽)씨가 부인 문송숙씨와 함께 자신이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용 케이크를 들어 보이고 있다.박영대기자 sannae@donga.com

“여보, 이 케이크는 하루가 지났어요. 팔지 말고 진열만 해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케이크 전문점 ‘에구치’. 크리스마스 대목을 앞두고 케이크 1개가 아쉬운 판에 에구치씨가 부인 문씨에게 입바른 소리를 한다. 만든 지 24시간이 지난 케이크는 팔지 않는다는 게 그의 원칙. 케이크 맛이 떨어진다는 평가는 곧 자신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케이크요? 한마디로 표현하면 ‘기쁨’입니다. 만드는 사람, 주는 사람, 받는 사람, 먹는 사람 모두가 행복하잖아요.”

오전 5시에 일어나 밤 12시 무렵까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하루에 케이크 100개 정도를 직원들과 만들고 나면 온 몸이 축 늘어지지만 마음은 행복하다고 했다.

▼에구치씨의 작품 ▼
성야, 스톨렌

“소학교(초등학교)를 다닐 때 처음 슈크림 케이크를 먹었죠. 입에서 사르르 녹는 게 어찌나 맛있던지…. 그때부터 앞으로 케이크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었죠.”

에구치씨의 고향은 일본 니가타(新潟)현 중에서도 시골인 오시마(大島). 케이크를 파는 시내로 나가려면 버스로 2시간은 족히 걸렸다고 했다. 밥과 미소시루(한국의 된장국과 비슷한 일본 국)만 먹던 소년에게 달콤한 케이크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음식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제과점에 취직해 5년간 일을 한 그는 ‘실력 부족’을 몸으로 느꼈다고 했다. 일본 최고의 제과학교로 불리는 도쿄제과학교에 들어간 것도 이 때문이다. 학교를 마치고 4년간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오자 그의 모교인 도쿄제과학교에서 교수직을 제의했다.

“케이크 만드는 솜씨는 100점이지만, 경영은 0점이에요.”

매장 경영을 맡고 있는 부인 문씨가 참았던 불만을 터뜨렸다. ‘에구치 마니아’가 있을 정도로 이름도 꽤 알려졌고 손님도 꾸준하니까 돈이 불어야 정상. 그런데도 여전히 적자 신세라는 것이다.

문씨는 최고의 재료와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남편이 영 못마땅하다. 임대료와 재료값은 하루가 다르게 뛰는 데 케이크 값은 남편의 고집대로 4년 전 그대로다.

“남편 대신 일본에 가서 크리스마스 케이크 신제품 카탈로그를 몽땅 구해왔어요. 베껴서라도 돈을 좀 벌자는 생각이었죠. 남편은 카탈로그를 휙 던져 버리더군요.”

문씨의 하소연에 에구치씨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부인 문씨는 도쿄제과학교 교수 시절 만났다. 케이크를 배우기 위해 일본에 유학 온 문씨와 스승과 제자로 만나 결혼까지 했다. 케이크가 맺어 준 인연인 셈이다.

“케이크 맛은 재료가 결정합니다. 그리고 정성으로 맛을 내야 합니다.”

신세계백화점 서울 강남점과 압구정동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케이크 전문점 2곳을 운영하는 에구치씨는 일주일에 3번 오전 5시에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에 나간다. 케이크 장식에 필요한 과일을 직접 고르기 위해서다. 가격은 중요하지 않다. 오죽하면 한국말도 서툰 그가 도매시장 과일 상인들을 줄줄 꿰고 있을까. 케이크에 들어가는 스펀지(계란으로 만든 카스테라 종류)도 케이크마다 다르다. 인공 향신료 대신 천연 과실주로 향을 낸다. 그래서 에구치씨의 케이크는 잘라서 먹어봐야 진가를 안다는 말이 나온다.

“크리스마스 때는 온 가족이 다같이 모입니다.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할아버지와 아이들도 같이 즐길 수 있도록 너무 달거나 시지 않게 만들어요.”

에구치씨의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요란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빨간 과일과 푸른 나무 장식을 얹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는 게 고작이다.

“남편처럼 한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일본 남자는 없을걸요.”

문씨의 말마따나 평생 빵을 반죽해 솥뚜껑처럼 커진 에구치씨의 손은 막일을 하는 사람처럼 거칠었다. 빵 만들고 설거지하고, 퇴근한 직원 대신 매장에서 팔고 남은 빵을 트럭으로 옮기는 일까지 에구치씨의 몫이다.

기술만 배우면 등을 돌리는 한국인 직원과 일본인이라는 따가운 주위의 시선도 그를 힘들게 했다. 한국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언제냐고 묻자 그는 “글쎄, 한 2번 정도 있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간 겪은 맘고생이 묻어 나왔다.

“그래도 ‘에구치’라는 이름을 이을 한국인 후계자를 키워야죠.” 새해에 일본인 에구치씨가 한국에서 풀어야 할 숙제다.

박 용기자 parky@donga.com

박형준기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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