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3년 8월 4일 18시 48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고(故)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창업자의 5남인 정 회장은 서울 보성고와 연세대 국문과를 나와 75년 11월 현대중공업 사원으로 입사했다. 81년 현대상선 대표이사 사장을 맡으면서 경영전면에 나선 그는 이후 현대전자 사장, 현대상선 부회장, 현대그룹 부회장, 현대건설 회장을 거쳐 98년에는 형인 정몽구(鄭夢九) 현대자동차 회장과 함께 그룹 공동회장에 취임하는 등 탄탄대로를 걸었다.
![]() |
92년 현대상선 비자금 사건으로 수감되는 고초도 겪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아버지의 총애를 받게 된다.
고인은 97년 ‘소떼 방북’에 나서면서 정 명예회장의 역점사업인 대북사업의 후계자로 주목받는다. 당시 몽구 몽헌 두 형제는 아버지의 심중을 잡기 위해 대북사업 주도권 경쟁을 벌였으며 이익치(李益治) 당시 현대증권 회장 등의 ‘활약’으로 고 정 회장이 대북사업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2000년 3월 몽구 몽헌 형제의 경영권 다툼으로 번진 ‘왕자의 난’을 계기로 고 정 회장의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왕자의 난에서 공식적으로 현대가의 법통을 이은 것은 몽헌 회장이었지만 형 몽구 회장이 현대자동차를, 동생인 정몽준(鄭夢準) 의원이 중공업을 이끌고 현대를 떠나면서 현대호는 비틀거린다.
몽헌 회장의 주력기업인 현대건설과 하이닉스반도체는 심각한 유동성 위기 끝에 2001년 5월 대주주 지분 감자(減資)와 채권단 출자전환으로 고 정 회장의 손을 떠난다. 고인은 현대아산, 현대상선, 현대종합상사, 현대택배 등을 거느린 소그룹 회장으로 전락한다.
이런 그에게 대북사업은 재기의 발판이자 그의 발목을 잡는 양날의 칼로 작용했다.
2000년 6월 현대아산이사회 회장 취임 이후 금강산 관광사업 등 대북사업에 전념했으나 무리한 사업추진으로 현대 계열사의 자금난을 초래했다.
대북 송금 의혹을 규명하는 특검의 조사를 받으면서도 대북사업에 강한 집착을 보인 데는 그룹을 재건하고 대북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해야 하는 그만의 고민과 부담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평소 소탈하고 사려 깊은 성격이지만 업무에 관한 한 ‘불같은’ 성격도 있었다고 현대 관계자들은 전했다.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