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사협회 세미나]이사회 현실과 문제점

  • 입력 2003년 3월 23일 17시 56분


코멘트
21일 대전 유성구 스파피아 호텔에서 한국이사협회 회원 30여명이 ‘바람직한 기업지배구조와 이사회의 역할’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있다.  대전=나성엽기자
21일 대전 유성구 스파피아 호텔에서 한국이사협회 회원 30여명이 ‘바람직한 기업지배구조와 이사회의 역할’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있다. 대전=나성엽기자
《이사(理事)들이 들고 일어섰다. 최근 현대그룹의 불투명한 대북 지원과 SK글로벌의 회계분식, 그리고 민간기업에 대한 정부의 인사 개입 등으로 한국의 기업 이미지가 얼룩진 것은 ‘이사들 탓’이라며 앞으로는 ‘가시밭길’을 걷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주주를 대변하고 최고경영자를 견제한다’고 교과서에 쓰여진 이사의 역할. 이제부터는 교과서대로 하겠다는 이들의 앞길에, 그러나 장애물은 너무 많다. 주주 편을 들다가 오너 눈밖에 나지 않을까, 어떤 최고경영자(CEO)는 이사회가 필요 없을 정도로 잘하는데, 자칫 ‘노조 대변인’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데…. 이사들이 고민하는 현장 분위기는 이랬다.》

“한국 기업이 기업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능력 있고 중립적인 이사회가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전문지식과 공정한 자세를 갖춘 이사를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는 세계은행,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제 투자기관들의 일관된 주장이기도 하다.”(한국이사협회 이헌재 회장·전 재정경제부 장관)

“지금 시스템에서 능력 있는 이사의 출현을 기대하기 힘들다. 오너 경영체제에 정서적으로 익숙해져 있다. 예를 들어 ‘삼성’이라는 기업 자체보다 ‘이병철’‘이건희’를 떠올리는 식이다. 대주주를 견제하고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이사의 권한과 능력을 인정해 줄 제3자가 있어야 한다.”(이사협회 김일섭 부회장·이화여대 부총장)

우리금융지주회사 신한금융지주회사 KT 국민투자신탁 대신증권 동국제강 등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의 현직 이사 30여명이 이사회 기능정상화, 주주가치 중시, 신뢰·윤리경영 등을 다짐했다.

21일 대전 유성구 스파피아 호텔에서 열린 한국이사협회 세미나에 참석한 이사들은 “최근 SK의 회계부정과 민간기업에 대한 정부의 인사 개입 등으로 한국의 기업이미지가 얼룩진 것은 그동안 이사회가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박상용 연세대교수(경영학)는 이사협회의 출범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외환위기 후 150여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것도 결국 기업의 이사회가 제 기능을 못했기 때문이다. 창업 일가의 지분이 5%에도 못 미치는데 이들을 ‘오너’라고 부르며 이사회가 장악돼 부실하고 방만한 경영을 견제하지 못한 것이다. 이 같은 반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사회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모임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날 논쟁은 메릴린치 이원기 전무의 강의가 끝나면서부터 불붙었다. 이 전무는 “한국 기업들의 지배구조가 개선되고,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하지 않는 한 국내 증시를 주도하는 외국인들은 지금처럼 계속 한국 기업을 저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토론은 이어졌다.

“외국인투자자들이 지배구조 때문에 한국기업을 저평가했다면 외국인들도 자신이 주주로 있는 기업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이사회가 무력한 것은 오너가 월급쟁이 이사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집단소송제가 도입되면 이사회 분위기는 많이 바뀔 것이다. 총수 시키는 대로 하다가는 이사들도 패가망신하기 때문이다.”

“한국 나름대로의 기업 경영스타일과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분위기는 곧 개선안을 찾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사들은 “경영에 관심을 기울이는 주요 주주들, 주주의 이익을 지키고 CEO를 견제하는 객관적 이사진, 그리고 역량 있는 CEO 등 3요소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동의하면서 “국내 정서와 관행을 깨는 일이 쉽지는 않겠으나 이사 본연의 자세를 되찾기 위해 가시밭길을 걷자”고 다짐했다.

대전=허승호기자 tigera@donga.com

나성엽기자 cpu@donga.com

▼김일섭 이사협 부회장 "이사선임-평가 오너가 장악은 안돼" ▼

“이사회를 강화하고 기능을 정상화할 수 있는 방안은 있습니다. 이 일을 포기하면 한국 경제의 미래는 밝지 않습니다.”

김일섭(金一燮·이화여대 경영부총장·사진) 한국이사협회 부회장의 말이다.

김 부회장은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를 선진국 수준으로 높이기 위해 지난해 11월 한국이사협회가 창설됐다”며 “이를 위해서는 오너 중심의 경영체제를 견제할 수 있는 중립적인 이사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사회는 ‘오너의 머슴이나 가신’이 아니라 주주만을 섬기는 전문경영인 조직이 돼야 한다”며 “이를 위해 이사 개개인은 전문지식과 공정성, 그리고 높은 윤리의식과 자긍심을 고루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형식논리로는 주주총회가 기업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이지만 현실에서는 주주나 주총이 무력화되기 쉽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오너의 독재’가, 미국에서는 ‘최고경영자(CEO)의 독재’가 나타나곤 하지요. 일부 공기업의 경우에는 노조의 전횡이 빚어지기도 합니다.”

그는 주총 무력화 현상을 막기 위한 방안으로 우선 ‘주요 주주 협의회의 활성화’를 제안했다.

“1∼2% 등 일정 지분 이상의 주요 주주들이 주총 이전에 미리 모여 주총 의안을 검토하고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이 제도가 활성화되면 오너나 CEO가 함부로 주주이익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관투자가의 경영감시와 주주권 행사가 긴요합니다.”

그는 또 이사회의 정상화 및 중립화를 위해서는 이사의 선임 및 평가가 오너에 의해 일방적으로 장악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사에 대한 상호평가, 다면평가, 3자 평가 등이 활성화돼야 한다는 것.

“이사회 의장과 CEO를 분리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CEO는 ‘집행하는 사람’으로 주총과 이사회에서 결정된 것을 실행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반면 이사회 의장은 사외이사를 대표하면서 CEO 등 집행임원을 감시 평가하는 방식이지요. 또 사내 인사만으로 이사회가 구성되는 ‘근친교배’ 현상을 예방하기 위해 이사 추천권을 사외이사들이 행사하는 방식도 가능합니다. 2월에 국민은행이 이 같은 방식으로 신임 이사를 선임했습니다. 사외이사는 거수기나 고무도장이 되면 안 됩니다.”

그는 ‘CEO-대주주-이사회’의 삼각축이 원활히 작동해야 선진 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이어 지배구조 정상화를 위해서는 정부의 역할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기관이 사전·사후 감독을 통해 기업경영진에 대한 견제기능을 수행해야 하며 금융기관에 정치적 입김이 작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시장규칙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집행해야 하며 이를 위해 금융감독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등을 중립적으로 운영해야 합니다. 이 같은 측면에서 볼 때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의 원죄(原罪)는 상당 부분 정부가 안고 있지요. 새 정부가 지배구조 개선과 경제 선진화를 위해 해야 할 일입니다.”

대전=허승호기자 tiger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