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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10월 10일 16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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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경영자(CEO)가 되는 법’을 공부하러 미국 뉴욕주 오시닝에 있는 제너럴일렉트릭(GE)의 크로턴빌연수원을 찾았기 때문. 이곳에서 이 상무보는 15일까지 22일 동안 EDC(Executive Development Course) 과정을 밟는다.
GE는 흔히 ‘인재 사관학교’라고 불린다. ‘키워진 인재 모셔오기’에 열중하는 많은 기업과 달리 사람을 키워서 인재를 스스로 확보하는 전략을 일찌감치 채택했기 때문. GE가 숱한 고비를 넘기면서 세계 일류 기업으로 우뚝 선 데는 이 독특한 인재개발 시스템이 밑바탕이 됐다.
GE 출신 CEO들은 이 때문에 항상 다른 기업의 스카우트 대상이 된다. 실제로 지난 몇 년 동안 차기 회장 자리를 놓고 제프리 이멜트 현 회장과다퉜던 제임스 맥너니 주니어 GE 항공엔진 사장, 로버트 나르델리 GE 파워시스템스 사장은 2001년 9월 경쟁에서 탈락하자마자 각각 3M과 홈데포의 CEO로 영입됐다.
●CEO 노릇도 배워야 한다
이재용 상무보가 GE의 CEO 후보생들만 들어가는 EDC에 외부인으로는 처음으로 들어가게 된 데는 이멜트 GE회장의 역할이 컸다.
이멜트 회장은 지난해 10월 회장 취임을 기념해 세계 각국을 돌던 중 한국에 오게 됐다. 항공기 엔진과 의료기기, 조명기기 등에서 20년 이상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과 이멜트 회장이 식사를 하며 오랜 유대관계를 확인했던 것은 당연한 절차.
식탁에서 두 사람 사이 화제는 삼성의 차기 후계자 이재용 상무보로 옮겨갔다. 이멜트 회장 자신이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쟁쟁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GE의 회장이 됐기 때문에 30대에 삼성의 차세대 후계자로 거론되는 이 상무보에 대해 관심이 높았던 것.
당시 배석했던 강석진 GE 코리아 회장(당시 사장)은 “이멜트 회장이 이 상무보에 대해 큰 호감을 갖고 있었다”고 전했다.
이멜트 회장은 자신이 회장으로 선출되는 바탕이 된 EDC 과정을 삼성의 후계자라면 들어볼 만하다며 이 회장에게 적극 추천했다. 이후 두 그룹은 내부 논의과정을 거쳤다.
GE는 ‘외부인을 내부 경영자 과정에 어떻게 받아들이나’를 놓고 고민했으며 삼성도 ‘굳이 다른 회사의 교육까지 받아야 하나’를 놓고 고민했다. 그러나 양측은 “두 회사의 협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에서 지금까지 유일하게 이 과정을 수료한 GE코리아 강 회장은 “이 상무보는 이번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것”이라고 말했다. 직급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연수생이 제안한 의견이면 모든 것을 다 검토하고 토론해 합의에 도달하는 GE식 열린 문화, 문제에 봉착했을 때 해결하는 GE의 전략적 사고방식과 접근방식 등을 몸에 익히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EDC는 어떤 프로그램인가
EDC는 GE의 ‘리더십 교육과정’ 6단계 중 최상위급에 해당한다. 전세계 30여만명의 GE의 직원 가운데 CEO 후보 30명만 모아서, 1년에 단 한차례 교육을 실시한다. 최종교육 대상자는 이멜트 회장이 한사람 한사람 서류심사등을 통해 결정한다.
강석진 회장은 “단순히 지금까지 실적이 좋았다거나 장래성이 있는 간부사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 더 고위직까지 오를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 즉 차기 GE회장 후보들이 뽑힌다”고 말했다.
이들은 GE 크로턴빌 연수원에 모인다. 이 연수원은 1956년 설립된 뒤 1983년 잭 웰치 전 회장이 대규모로 투자해 현재의 모양을 갖췄다. GE 인재개발시스템의 핵이다.
30명의 CEO 후보들은 오전 8시 공식 일정이 시작되기 이전 기숙사에서 일어나 구내 식당에서 ‘번개같이’ 식사를 하고 피트니스센터에 들러 운동을 한다. 오후 6시까지는 수업이 진행되며 이후 저녁 식사를 한 뒤 강의준비와 과제를 처리한다.
“식사는 함께 구내 식당에서 해결하며 자는 시간 빼고는 개인시간이 없다”는 게 강 회장의 설명이다. 다만 그는 ‘없는 시간 빼 가며’ 오후 11시쯤 동료들과 숙소를 빠져나와 맥주집에서 우정을 다지기도 했다.
처음 10일 가량은 사내·외 강사진들의 강의가 이어진다. 주로 글로벌 리더가 되기 위한 소양 교육이다. 외부 강사는 교수도 있지만 다른 회사의 CEO도 있다. “경쟁 관계만 아니면 ‘인재 사관학교’ GE의 연수원에서 강의한다는 게 다른 회사 CEO에게도 영광”이라는 게 강 회장의 설명.
후반부 2주일에는 현장학습이 진행된다. 연수생들에게는 경영학 교과서에 나오는 케이스 스터디가 아니라 GE가 맞닥뜨린 최악의 난제가 과제로 주어진다. ‘진짜’ 문제를 통해 ‘경영자로서의 전략적 판단’을 내리는 연습을 한다.
강 회장은 유럽 진출을 고민하던 당시의 회사로부터 ‘사업부문 별로 유럽진출 전략을 제시하라’는 과제를 받았다. 5개조로 나뉜 30명은 2주일 동안 유럽 전역을 차로, 비행기로 돌면서 고객, 직원들의 의견을 들었다. 이 과제를 위해 연수도 크로턴빌이 아닌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받았다.
그 결과 수강생들은 유럽인들의 GE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을 보았으며 유럽 시장 접근 방식을 바꿔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지막 한 주는 크로턴빌에서 진행된다. 회장과 사업부의 CEO들이 모두 참가하는 정리보고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연수생들이 제안한 문제점과 해결과제는 토론을 거쳐 그 자리에서 경영에 반영된다. 연수생들의 제안은 대부분 채택된다.
강 회장 동기들은 강사 가운데 ‘고객만족’을 주제로 강의한 스웨덴 회사의 CEO를 GE가 스카우트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당시 GE는 고객만족을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지 않던 시절이라 이 강의는 수강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CEO는 석 달 뒤 GE에 합류했다. 동료 연수생이었던 데이비드 니센 GE캐피탈 당시 부사장은 현재 아시아 총괄 사장이 돼 있다.
EDC 연수과정은 이런 점에서 차세대 리더를 발탁하는 경영과정이자 곧 인재충원의 수단이 된다.
강 회장은 “우리 스스로가 조그만 사업분야의 CEO들이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 진짜 CEO로 거듭나게 된다”며 “수강생들끼리도 문제접근 방식과 해결방식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서로 배우며, 이 과정이 끝나고 나면 완전히 ‘배꼽친구’처럼 가깝게 친해진다”고 말했다.
●삼성의 CEO교육
그러면 삼성은 지금까지 이 상무보를 어떻게 교육해 왔을까.
삼성에는 GE와 같은 공식 후계자 교육 과정은 없다. 다만 현 회장 밑에서 보고 배우며, 여러 계열사의 CEO들로부터 조언을 들으며 실무를 익혀간다.
삼성의 후계자 교육 과정은 혹독하기로 이름이 높다. 이건희 회장 자신도 이병철 선대 회장 밑에서 무려 21년 동안 경영수업을 거친 뒤 회장 자리에 올랐다. 교육방식은 대개 ‘실전투입’ 이후 ‘결과 채점과 상벌’이었다.
이건희 회장의 가장 큰 교사는 선친 이병철 회장이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결코 자애로운 교사가 아니었다. 이 회장은 취임 이후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은 단 한번 뿐이었다. 그것도 구체적인 어떤 성과를 칭찬한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부모로 변함없이 섬겨왔듯이 경영도 그렇게 변함없이 하라는 말이었다”고 회고했다.
80년대 중반, 이건희 당시 삼성물산 부회장은 “수익이 나지 않으면 과감히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며 특정사업을 접자는 의견을 개진했다가 아버지로부터 ‘설명’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뒤 이 회장은 오히려 그 분야를 강화해 반석에 올려놓았다.
고 이병철 회장의 지도방식은 철저히 공격적인 맨투맨 수업이었다. 수시로 아들을 불러 계열사 사정을 물어보곤 했다. 담당 사장도 두 시간 정도씩 불려갔다 오면 혼이 빠져 그 뒤 한나절은 일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 회장은 거의 매일 비수 같은 아버지의 질문을 막아내며 자신이 생각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이 상무보는 이 회장(26세)보다 조금 늦은 나이인 33세에 임원으로서 경영에 공식 참여했다. 그가 받은 첫 번째 경영수업은 신임임원 교육. 지난해 3월 경기 용인 연수원에서 5박6일 동안 진행된 이 과정에서 그는 ‘디지털 경영자’가 되기 위한 다양한 강연을 들었다. 현명관 당시 삼성물산 회장이 ‘경영자가 갖춰야 할 리더십’ 등을 강연했고 ‘난타’ ‘금난새 음악회’ 같은 연주회도 열렸다. ‘감성’과 ‘창의성’ 교육을 병행하기 위해서다.
임원교육은 공식행사에 가깝다. 실제 수업은 ‘현장체험’과 ‘1 대 1 개별 수업’을 통해 이뤄진다.
“기업을 알려면 현장을 찾아가라”는 것은 아버지 이 회장의 지론이다. 이 상무보는 지난해 스스로 해외공장 방문일정을 짜서 100일 이상을 외국에서 보냈다.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 삼성의 공장이 있는 지역 중 가장 낙후한 곳인 브라질의 마나우스 전자공장 단지. 이후에는 생일과 추석연휴에도 말레이시아 영국 등을 돌았다. 특히 지난해 10월말부터 11월까지는 이 회장 및 전자 사장단과 함께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를 돌며 대 중국 전략을 세웠다. 수원 구미 온양 등 전자 관련 국내 사업장 6군데는 수시로 들른다.
현장 공부 이외의 수업은 ‘1 대 1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 상무보는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과 삼성전자 윤종용 부회장으로부터 경영전반에 대한 실무를 배운다. 첨단 전자기술 동향에 대한 궁금증은 진대제 이기태 삼성전자 사장, 금융실무에 관한 의문은 황영기 삼성증권 사장을 통해 수시로 해결한다.
해외 고위급 인사들을 만나 친분을 만들고 ‘한 수’ 배우는 것도 CEO수업의 중요과정. 그는 이멜트 회장뿐만 아니라 니시무로 다이조 도시바 회장, 주룽지 중국 총리, 자크 로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등을 만났다.
그러나 이 상무보가 받아야 할 CEO교육은 아직 많이 남은 것 같다. 최근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이 회장은 “그 자리에서 좀 더 배워야 한다”고 이 상무보를 평가했다. 현재 EDC 수업 중인 이 상무보에 대해 삼성측은 “지난 2년 동안 경영수업 총론(總論)을 배웠다면 이제부터는 각론(各論)으로 들어가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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