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심상찮다"…삼성, 비상경영체제로

  • 입력 2000년 10월 18일 18시 27분


코멘트
11일 오전 서울 태평로 삼성그룹 본관 27층 회의실. 삼성 사장단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학수(李鶴洙)구조조정본부장을 비롯해 국내 최대그룹인 삼성을 이끄는 20여개 계열사 사장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대내외 악재가 잇따른 탓인지 회의는 비장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한 참석자가 “요즘 경제 흐름이 심상찮으니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자”고 운을 뗐다. 삼성증권이 외국계 투자자들의 시각을 포함해 향후 주식시장 전망과 최근의 경제동향에 대해 브리핑했다.

사장들의 난상토론이 이어졌다. 결론은 “현재 우리 경제가 처한 여건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편입된 97년말 못지않은 비상국면이다”라는 것.

그룹측은 각 계열사에 대해 올 상반기용으로 수립한 컨틴전시 플랜(비상대책)을 전면 재작성하고 연말이나 내년초에 시중에 자금난이 생기더라도 버틸 수 있도록 현금을 넉넉히 확보해둘 것을 지시했다.

▽삼성, 우리 경제를 어떻게 보나〓삼성은 앞으로의 주가 움직임과 관련한 최대 변수로 부실기업 처리문제를 꼽았다. 이것이 2차 금융 및 기업구조조정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부실기업이 얼마나 시장원리에 입각해 처리되느냐에 따라 외국인 투자자들의 매매 패턴이 결정되고 이는 곧바로 국내 주식시장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논리.

또 유가급등과 반도체가격 하락 등 대내외 여건이 당초 예상보다 훨씬 비관적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점을 걱정했다. 계열사간 협력을 강화해 상황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한마디로 지금은 과감한 투자를 통해 기업의 외연을 넓힐 때가 아니라 본격적인 불황에 대비해 긴축 경영으로 기업의 내실을 다져야 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긴축 현금위주’의 경영〓삼성 사장단은 이같은 분석을 토대로 당분간 주가가 오르거나 기업경영 여건이 호전될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자금운용과 신규투자, 고용 등 전반적인 경영 기조를 매우 보수적으로 끌고 가기로 했다. 올해 기대 이상의 수익을 낸 분야라 하더라도 극소수 전략부문 외에는 사업 확장을 허용치 않고 그 대신 유동성 관리에 주력한다는 방침.

삼성 관계자는 “경제개혁이 수포로 돌아갈 경우 내년 2월을 전후해 정말 좋지 않은 상황으로 번지는 것 아닌가 하는 위기감을 떨칠 수 없다”며 “상황별로 여러 시나리오를 작성해놓고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비관적인 카드 쪽으로 무게가 실리는 형국”이라고 설명했다.

재계는 올해 10조원대의 세후 순이익을 올릴 것이 확실시되는 삼성그룹이 이처럼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하자 더욱 긴장하는 모습. 한 중견그룹 임원은 “삼성의 정보력과 치밀한 판단능력을 감안할 때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