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총리 수백억대 부동산 명의신탁" 세금회피 목적

  • 입력 2000년 5월 17일 19시 34분


박태준(朴泰俊)국무총리가 포항제철 회장 및 민자당 대표위원을 지내던 88∼93년 세금을 적게 내고 공직자 재산 과다보유에 따른 비난을 피하기 위해 재산 관리인에게 수백억원대의 부동산을 명의신탁했다는 사실이 재판과정에서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박총리의 재산관리인 조창선씨(60)가 “정당하게 취득한 부동산을 세무당국이 박총리의 은닉재산으로 몰아 증여세 등 20여억원을 부과한 처분은 부당하다”며 서울 역삼세무서를 상대로 낸 행정소송의 1심 판결문에서 확인됐다.

17일 서울 행정법원 행정2부(재판장 김치중·金治中 부장판사)에 따르면 박총리는 부인 장옥자씨와 함께 서울 중구 을지로 소재 토지 29평과 건물 96평의 일부 등 모두 6건을 구입한 뒤 조씨에게 명의신탁했다. 박총리는 6건의 부동산 가운데 88년7월∼93년2월 3건을 구입하면서 최소한 58억여원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재판부는 “박총리는 명의신탁한 뒤 조씨에게 4건의 부동산으로 상가 및 주차빌딩 운영을 시켜 종합소득세 등을 낮추려고 했다”고 판결문에서 분명하게 밝혔다.

재판부는 “90년 12월 개정된 구 상속세법상 재산명의자와 실소유자가 다를 경우 실소유자가 증여한 것으로 본다”며 “임대사업을 한 건물들은 박태준씨와 부인이 구입한 뒤 조씨 명의로 임대해 왔고 종합소득세를 줄이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보여 조씨가 증여세를 내는 것이 옳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또 “박총리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토지, 중구 오장동 토지의 명의를 분산하여 오장동 빌딩을 구입한 뒤 조씨를 통해 임대사업을 시켰다는 점도 인정된다”고 밝혔다.

조씨는 소송을 내면서 “박총리가 명의신탁한 것은 공직자 재산등록을 하면서 재산규모가 너무 클 경우 받게 될 부정적인 여론을 피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고 주장했었다.

재판부는 박총리가 88∼90년 구입한 서울 중구 을지로 3가의 건물 및 강남구 역삼동 토지 등 2건의 부동산에 대해서는 “공직자(포철 회장)로서 재산을 줄이기 위해 명의신탁한 사실은 인정되나 세금 회피 목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이날 “역삼세무서는 88년과 90년도에 조씨에게 부과한 세금(증여세) 가운데 7억6000만원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박총리측은 그러나 94년 10월 서울 중구 오장동 소재 센츄리빌딩과 경일주차장 빌딩에 대한 세금부과 소송과정에선 문제의 두 부동산의 등기명의자가 아니며 등기명의자 및 사업등록자로 되어있는 조씨와 아무런 명의신탁관계도 없다고 주장했었다. 박총리측은 당시 서울 서대문세무서가 두 빌딩에 대해 5억9900만원의 종합소득세 등 세금을 물리자 본인소유가 아닌 부동산을 타인명의의 본인재산으로 봐 세금을 부과한 것은 부당하다고 소송을 냈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총리실 반응▼

총리실은 17일 박태준(朴泰俊)총리가 공직자 재산등록과정의 물의를 피하기 위해 88년 자신의 부동산을 명의신탁해 숨겨왔다는 사실이 재판과정에서 드러나자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총리실은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행정법원의 판결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판결내용에 대한 박총리의 해명을 요구하는 기자들의 문의가 빗발치자 부랴부랴 집무실에서 구수회의를 갖고 대책을 마련.

1차 회의가 끝난 뒤 박정호(朴正浩)공보수석비서관은 “12년 전의 일이고, 소송 당사자가 총리가 아니다”는 짤막한 논평으로 넘어가려 했으나 사건이 심상치 않게 전개되자 “공인으로서 물의를 빚어 유감”이라는 총리의 사과발언을 공개했다.

총리실 관계자들은 또 총리가 96년 소송 원고인 조창선씨로부터 3건의 부동산을 환수, 포항 보궐선거에 당선된 97년7월 재산공개때 이를 공개한 근거자료를 제시하며 파문의 확산을 막는데 주력했다. 박수석비서관은 “총리가 원래 재산에 신경을 쓰지 않는 분 아니냐” “총리 사모님이 아시는 일이다”며 박총리 보호에 진력하는 모습이었다.

총리실의 한 관계자는 “88년에는 부동산 명의신탁이 불법은 아니었다”며 “도덕성 여부는 여러분이 판단하고 법적으로 하자가 없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밝힌다”고 강조했다.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

▼명의신탁▼

명의신탁(名義信託)이란 부동산을 실제로 소유한 사람(신탁자)이 다른 사람(수탁자)의 이름을 빌려 소유권 등기를 하는 등 외관상 소유관계를 위장하는 계약행위다.

95년 7월1일부터 ‘부동산 실권리자 명의등기에 관한 법률’이 시행돼 부동산에 대한 명의신탁 계약은 원천적으로 무효이고 적발될 경우 신탁자와 수탁자 모두 형사처벌을 받는다. 법이 시행되기 전까지 명의신탁은 유효한 계약으로 인정됐고 형사처벌 조항도 없었다. 다만 세금을 포탈하거나 민사상 강제집행을 면하기 위해 명의신탁을 한 경우는 당시에도 조세법처벌법 등으로 처벌이 가능했다.

박태준(朴泰俊)총리의 경우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명의신탁을 한 사실이 밝혀졌지만 법 시행 후 유예기간(1년) 내인 96년 8월 문제의 부동산을 실명전환했기 때문에 이번 판결이 확정되더라도 형사처벌은 물론이고 행정벌인 과징금과 이행강제금을 물지 않아도 된다.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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