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왕자의 난'일단락] MK의 '저돌' MH'전략'에 패배

  • 입력 2000년 3월 27일 20시 12분


후계구도를 둘러싼 정몽구(鄭夢九) 몽헌(夢憲) 두형제의 갈등이 몽헌회장의 일방적인 승리로 매듭지어진 이면에는 나름대로의 승인과 패인이 존재한다.

재계는 13일간 계속된 양측의 공방을 전투에 비유한다면 몽구 회장측은 치밀한 계획이나 조직력의 뒷받침 없이 섣불리 일을 저지른 반면 몽헌회장측은 정주영(鄭周永)명예회장의 신임을 빼놓더라도 명예회장의 비서실장(김윤규 현대건설사장) 상황실(구조조정본부) 경비사(건물관리를 맡고있는 현대건설)를 장악한데다 참모들의 탁월한 전략까지 일조, 승리를 차지한 것으로 분석한다.

처음 포문을 연 곳은 MK진영. 일요일이었던 14일 MK측은 왕회장의 허락을 얻어 이익치회장을 고려산업개발로 전보시키는 인사 내용을 언론에 통보했다. 몽헌회장이 해외 출장으로 왕회장의 옆자리를 비운 틈을 노려 MH진영의 허를 찌른 것. MH계열인 이익치 회장을 몰아내고 중립적인 노정익(盧政益)부사장을 증권사장으로 임명, 금융소그룹의 세력판도를 바꿔 그룹 후계구도에서 유리한 입장에 서려 했던 것. 그러나 ‘수장(首長)’이 없는 상황에서도 MH진영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익치회장은 계속해서 현대증권으로 출근하며 무언의 저항을 계속했고 노사장은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당황한 MK진영은 그룹의 대외 공식 창구인 구조조정본부와 PR사업본부를 통해 내정 인사를 확정 발표하려고 했지만 김재수본부장과 이영일본부장은 “정몽헌회장이 없는 상태에서 결정된 인사는 발표할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텼다. 몽헌회장이 ‘작전 상황실’이나 다름없는 구조조정본부를 이미 장악하고 있었던 것. 결국 발표는 현대자동차 홍보실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

또 몽구회장이 여러 차례 왕회장을 만날 때 MH측 김윤규사장이 늘 배석, 몽구회장을 견제해왔지만 몽헌회장이 귀국 후 왕회장을 만날 때는 MK측 참모 어느 누구도 배석을 하지 못해 비서실과 상황실을 장악한 MH진영의 힘을 보여줬다.

22일, 전투에 새로운 변수가 돌출했다. 정명예회장이 느닷없이 이사를 하면서 종로구 청운동 자택을 몽구회장에게 물려준 것.

왕회장이 ‘가문은 장자가, 사업은 몽헌회장이 승계하라’는 뜻으로 집을 물려준 것을 몽구회장은 후계자 자리를 물려준 것으로 착각했고 참모들 역시 느슨해졌다. 당시 카메라 렌즈에 잡힌 몽구회장의 환한 얼굴이 이를 말해준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24일 몽헌회장이 귀국하면서부터. 몽헌회장은 귀국하자마자 왕회장과 독대한 뒤 14일의 인사 발표를 완전 뒤집었다. 게다가 ‘몽구회장의 그룹 회장직 박탈’이라는 강력한 반격을 개시했다.

MK측이 촉발한 소규모 전투가 아예 전면전으로 확대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몽헌회장은 20일간 해외에 체류하며 자신들의 작전을 노출시키지 않고 있다가 일거에 판세를 뒤집었다.

허를 찔린 MK진영은 25일 노장(老將) 박세용회장까지 끌어들여 마지막 반격을 준비했다. 26일 몽구회장은 왕회장의 친필 사인을 받아내 24일 인사를 백지화시켰다. 하지만 MH진영이 ‘사옥 봉쇄’라는 초강수를 두는 바람에 MK측은 이 사실을 호텔에서 발표, ‘반란군’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MK진영을 ‘반란군’으로 몰아붙인 MH측은 그룹의 ‘대변인’인 PR사업본부를 앞세워 언론발표를 함으로써 정통성을 과시해 현대자동차 홍보실을 통한 MK측 주장을 퇴색시키는데 성공했다. 또 27일에는 왕회장이 직접 나서도록 하는 아이디어를 실천함으로써 전투의 대미를 장식했다.

<금동근·홍석민기자>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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