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기업 이중문화]社內선 한국식 대외적으론 한국식

  • 입력 2000년 2월 21일 19시 42분


최근 유망 벤처기업으로 떠올라 창업투자사와 대기업으로부터 80억원의 투자금을 확보한 벤처기업 N사의 김사장(35).

대기업 기획실에서 일하던 김사장은 작년초 전자상거래관련 벤처기업을 창업하면서 “한국적인 기업경영을 탈피, 모든 것이 투명한 회사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김사장은 금년부터 광고회사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 비자금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기업을 하려면 역시 한국식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김사장이 내린 결론.

국내 벤처기업의 사내 문화는 국내 대기업들과 달리 ‘실리콘밸리 문화’로 상징되는 미국의 벤처기업과 흡사하다. ‘자율성, 진취성, 스톡옵션제를 통한 종업원의 주인의식, 수평적 의사소통, 속도경영, 미국식 해고제도’가 핵심.

국내 대기업들도 사내 벤처나 분사(分社)경영을 통해 국내 벤처기업의 문화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정도.

그러나 이들 벤처기업이 정부부처나 다른 대기업과 상대하면서 ‘한국식’ 기업문화를 따르지 않을 경우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많다. 특히 조직생활을 해보지 않은 컴퓨터전문가 출신 기업인들에게 어려움이 크다는 게 업계 내부의 평.

한국식 기업문화란 다름 아닌 ‘접대문화’ ‘연고주의’ ‘간판문화’ 등. 이 때문에 벤처기업들이 한국적 풍토에 적응하면서 사내에서는 ‘미국식 벤처문화’를 유지하고 대외적으로는 한국식을 따르는 ‘이중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대표적인 성공 벤처기업중 하나인 D사. 이 회사 L사장은 작년말 한 광고회사의 기획담당 이사와 대기업 자금담당 부장을 회사간부로 영입했다. 정부부처와 대기업 관계자들의 온갖 청탁에 시달리다 못해 대외관계를 ‘노련하게’ 처리할 인력을 스카우트한 것.

최근 유명 대학원의 고위 경영자과정이나 언론대학원 과정에 등록하는 벤처기업인도 늘고 있다. 이들이 업무와 관련없는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은 투자가들이 벤처기업 최고경영자(CEO)의 능력과 자질을 꼼꼼히 따져 투자하기보다는 CEO의 학벌이나 학력을 묻고 이를 중시하기 때문.

벤처 기업인 스스로 이중 문화를 형성하는 사례도 많다.

국내의 대표적인 벤처기업중 하나인 G사가 최근 하락세를 보이는 것과 관련 “회사가 성장한 뒤 사장이 창업공신을 멀리하고 동문이나 친지들을 대거 끌어들여 사내에 사장 인맥을 형성하면서 창업공신들이 회사를 떠났기 때문”이라고 업계에선 지적한다.

일부 벤처기업인들은 이미 특정고교나 특정대학 출신으로만 모임을 결성하는 등 배타적인 집단으로 변모, “개방성을 특징으로 하는 벤처문화에 역행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인터넷 자동차판매 사이트 ‘리베로’를 운영하는 유득찬사장(35)은 “벤처기업이 한국적인 기업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적응 또는 진화하는 과정에서 이런 이중문화가 나타나고 있다”며 “벤처기업이 ‘관계’를 강조하는 한국식 기업문화와 타협하지 않고 ‘내식대로’ 하기에는 아직 힘이 약한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병기기자>watch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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