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內銀들 어설픈 환거래, 외국 환투기세력만 재미

  • 입력 2000년 1월 5일 22시 12분


외환시장의 새해 첫 거래가 시작된 4일 원-달러 환율이 작년 종가(1138.00원)보다 무려 15.50원 급락해 달러당 1122.50원으로 마감되자 몇몇 외국계 딜러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연말연초 환율이 출렁거린 틈을 타 영업일 기준으로 불과 2,3일 사이에 달러당 20원 이상의 환차익을 거뒀기 때문. 작년말 국내 은행들의 달러 수요가 한꺼번에 몰려 환율이 최고 1150원까지 치솟자 향후 환율하락(원화가치 상승)을 예견한 외국 환투기세력들은 보유 달러를 기민하게 팔아치웠다. 외환딜러 A씨는 “국내 은행들의 어설픈 환거래로 이번에도 남 좋은 일만 시킨 꼴이 됐다”며 씁쓸해했다.

▽한치 앞을 못 내다본 단견〓Y2K를 의식한 외국계 금융기관들이 외환거래를 대폭 축소하면서 작년 12월 서울 외환시장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일부 외국계 은행은 한국 지점에 “새해가 되기 전에는 아예 거래를 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려보냈고 싱가포르 홍콩의 역외선물환시장(NDF) 딜러들은 일제히 휴가를 떠났다.

달러당 1130원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던 원화 가치가 급락한 것은 3,4개 국내 시중은행들이 28일과 29일 약속이라도 한 듯 거의 동시에 8억달러 규모의 매수주문을 내면서부터. 연말 결산일인 12월30일이 임박해 외화 대손충당금을 쌓기 위해 은행별로 1억∼4억달러씩 사들이자 원화가치는 이틀 연속 달러당 1150원까지 떨어졌다.

외국계은행 딜러 B씨는 “느긋하게 밀레니엄 휴가를 즐기던 NDF 딜러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모처럼 맞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휴양지에서 무선전화를 걸어 4억달러 정도를 팔아치웠다”고 소개했다.

▽앞으로가 더 문제〓환율이 옆걸음질하던 12월 초중순에 해당은행들이 미리 필요한 달러를 확보했거나 대규모 매입에 나서기 전에 시장동향을 치밀하게 파악했더라면 이번과 같은 사태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

국책은행 딜러 C씨는 “비교적 비싼 값에 달러를 팔아 운신의 폭이 넓어진 외국계가 올들어 공격적인 원화 공략에 나선 것도 4일 환율하락 폭을 키운 요인”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상황은 98년말과 99년초 사이에도 벌어졌다. 당시 원화가치 상승 억제에 집착한 외환당국이 국책은행을 통한 시장개입으로 98년말 환율종가를 1204원으로 묶어놓았지만 99년 개장일 환율이 1186원을 기록하면서 결과적으로 달러를 비싸게 사들인 국내 은행들이 큰 손실을 입었다. 작년 9월에는 시중은행들이 외채 조기상환을 위해 앞다퉈 해외 차입에 나서면서 조달코스트가 급등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외환시장 관계자들은 “상당수 은행들이 올해 4월 만기가 도래하는 외채를 갚기 위해 연초에 달러를 빌릴 계획인데 이번에도 수요가 한꺼번에 몰릴 경우 또 한번 비싼 금리를 물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원재기자> parkwj@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