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자금담당이사의 25시]은행 빚독촉에 눈앞 캄캄

  • 입력 1998년 6월 14일 19시 40분


‘오늘은 또 얼마를 막아야 하더라….’

대기업 A사의 자금담당 임원 L이사(42)가 집을 나서는 시간은 아침7시쯤. 오늘은 또 어떻게 메워야 하나. 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부터 머릿속이 복잡하다. 매일 똑같이 계속되는 ‘피말리는 자금막기 전쟁’이 이제는 두려울 지경.

평소라면 하루 결제자금이 40억∼50억원정도지만 오늘은 그 두배가 넘는 1백10억원이나 된다. 외국계은행 융자금 분할상환일이 돌아온 데다 늘 연장되던 은행 장기대출금중 일부(40억원)를 갚으라는 통보가 있었기 때문.

회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챙겨 보는 것이 바로 자금수지실적표다. 회사가 확보해둔 현금은 겨우 1백50억원. 오늘 하루 자금을 결제하고 나면 내일 막을 60억원, 모레 막을 55억원이 또 걱정이다. 자금팀 아침회의를 열어 오늘 내일중 들어올 돈을 계산해보니 영업부서의 수금 50억원뿐.

작년 경기가 괜찮았을 때만 해도 필요자금을 한달분씩 미리 확보해 별 어려움이 없었다. 부채가 좀 많긴 했지만 부채비율 250%대면 그래도 건전기업에 속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IMF이후 금융기관들이 곳간문을 걸어잠그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아무리 아등바등 자금을 끌어모아도 길면 일주일, 짧으면 2,3일치를 확보하는게 고작이다.

오전9시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며 은행 종금사 등으로부터 대출금 상환 독촉이 시작된다.

B은행 간부의 전화. “3일후 만기가 되는 대출금 2백억원중 60억원은 상환해달라”는 내용. 금융기관대출금은 예전같으면 당연히 연장됐지만 요즘엔 원금을 20∼50%는 갚아야 나머지를 연장해준다. 앞으로 3일 동안 필요한 자금이 1백60억원이나 되는데 또 60억원을 더 구해야 한다니, 눈앞이 캄캄해진다. 은행들은 신규대출을 중단한 지 이미 오래고 평소 가까이 지내온 종금사 여신담당자를 찾아가려 해도 “부실기업 리스트가 나온 후에 얘기하자”며 아예 만나주지도 않는다.

작년초만 해도 재무구조가 튼튼해 금융기관에서 돈을 써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던 A사. IMF한파로 하루매출이 40억∼50억원에서 20억∼30억원으로 절반가량 줄었다.

종업원을 내보내고 월급을 깎고 부수 경비를 작년의 절반으로 줄였지만 70%나 늘어난 이자부담때문에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더이상 견디기가 어렵다. 요새는 부채를 갚기는커녕 이자상환 사원급여지급도 어려워 빚만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연말쯤엔 여기저기서 꾸어온 돈만 1천억원이상이 될 판이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이번엔 L이사가 전화통에 매달린다. 곧 발행할 회사채를 인수할 기관을 찾기 위해서다. A사는 올상반기중 회사채 1천억원어치 발행을 추진했지만 투자기관들이 원리금 보증문제로 인수를 꺼려 미뤄 온 것.

동창생 친목회회원 등 지인을 총동원해 각종 연금 기금, 종금사의 책임자들에게 통사정을 하지만 모두들 “좀 두고 보자”며 확답을 주지 않는다. 오후4시경이면 곧 바닥날 자금잔고를 채우기 위해 주거래은행인 C은행으로 달려간다.

말도 끄집어내기 전에 이 은행의 K이사는 “지금 기업돌볼 틈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죽는 판이다”며 돌아앉는다. 신규대출 부탁은 운도 떼지 못하고 그냥 되돌아 올 수밖에 없다.

그래도 희망을 갖고 공들이고 있는 것은 자산매각 부문. 저녁식사를 마치면 지구 반대쪽에 있는 외국투자가와 부동산 매매협상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다. 얼마전 토지개발공사에 시가 4백50억원짜리 부동산을 2백40억원에 내놓았지만 더 싼 물건에 밀려 팔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2백억원까지 내려보지만 외국투자가는 터무니없이 깎으려 든다.

하나도 건진 것 없이 지나간 하루. 눈앞이 캄캄해진다. 결국 금고 깊숙이 넣어둔 A급 대기업의 진성어음 50억원을 할인해 어떻게 메워넣는 수밖에….

밤12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향하는 L이사. 그는 매일같이 은행 금고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이영이기자〉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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