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 유통업을 하던 박모씨(40·서울 영등포구 신길동)는 지난달 IMF한파로 부도를 내고 잠적했다. 그동안 부모와 형제의 인감을 가져다가 연대보증을 세워 자금을 조달해왔던 박씨가 부도를 낸 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전주 시골집을 담보로 잡혀줬던 아버지는 경매로 집이 넘어가 하루아침에 임대 아파트로 쫓겨났다. 공무원이던 누나와 매형은 매달 월급의 절반을 차압당하며 살던 아파트까지 내놨다. 도장을 형에게 내맡긴 동생도 3억원 상당의 집을 급매물로 내놨으며 또 다른 동생은 법원에 개인파산신청을 냈다.
‘정(情)’때문에 사회가 무너진다. 신용사회에 역행하는 도장찍기. 서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人)보증제도가 한국 전통의 가족 사회를 파괴, 수없는 선의의 피해자들을 낳고 있다.
IMF한파가 본격화된 지난해 12월 서울지방법원과 산하 4개 지원에서 보증채무 등으로 결정된 가압류 건수는 1만5천3백47건. 96년 같은 기간(1만2백81건)보다 무려 50%가까이 늘었다.
특히 금융기관이 여러명의 보증인중 빚을 갚을 한 명을 지정할 수 있는 연대보증의 경우 복잡한 경매 절차를 거치지 않고 손쉽게 채권을 회수할 수 있는 샐러리맨이 주 타킷이 된다.
최모씨(37·국회의원 비서관)는 94년 사업을 하는 친구가 2개 은행에서 3천만원을 대출받을 때 다른 친구들과 함께 연대보증을 섰다.
그러나 최근 친구가 부도를 내자 두 은행이 모두 최씨에게 전액을 배상할 것을 요구, 월급의 절반을 압류당하고 있다.
중소기업체 전무 홍모씨(46·서울 서초구 방배동)는 92년부터 7년째 매년 2천4백만원씩 보증빚을 갚아오고 있다. 여동생이 86년 대기업에 입사할 때 신원보증을 했던 홍씨는 92년 동생이 9억6천여만원의 회사공금을 유용하고 적발되자 회사측으로부터 변제하라는 요구를 받은 것.
결국 홍씨는 7년째 월급으로는 보증빚을 갚고 파출부로 나선 아내가 벌어오는 수입으로 생활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사람을 담보로 대출해주는 인보증 제도는 사문화된지 오래. 개인과 금융기관과의 거래실적과 철저한 신용 평가에 따른 대출만이 이뤄진다.
우리도 신용사회의 기반이 취약하다고는 하나 이제부터라도 금융기관이 신용조사기법을 개발, 사람을 볼모로 한 대출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이다. 금융기관에 신용을 보증해주는 기관이 있다고 하나 거기에다 또 사람보증을 세우니 결과는 마찬가지가 된다는 비판이다.
이영수(李英秀·63)변호사는 “일본에서 건너온 인적 보증 제도는 신용 거래 정착과 전통 가족 관계 유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폐지되어야할 제도”라며 “대신에 보증보험이나 신용대출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