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판의 대역배우와 엑스트라들. 빛나는 주연 배우의 이름에 가려 무명(無名)의 설움을 겪어야 하는 이들이다.
중소기업 제품들도 어찌보면 이들과 비슷한 처지다. 질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얼굴」이 없어 서럽다는 점에서 그렇다.
팬들이 스타에게 몰리는 것처럼 소비자들은 「잘 생긴」 유명 메이커 제품만 찾을 뿐 중소기업 제품은 잘 거들떠보려 하지 않는다. 결국 많은 중소기업들은 「살 길」을 찾기 위해 대기업의 이름을 빌리기 일쑤다.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으로 대기업의 우산 밑에 들어가는 것.
그런데 중소기업들의 이런 일반적인 「생존법」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최근 거세게 일고 있다. 「공동브랜드」 바람이다.
『혼자서 안되면 여럿이서 힘을 합해 대기업 제품에 맞서보자』는, 중소기업들의 「홀로 서기」아닌 「함께 서기」다.
이 바람은 가구 패션 운수업 등 점차 많은 업종으로 확산되고 있다. 가구업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지난해 10월 40여개 업체가 모여 만든 공동브랜드. 1년만에 참여 업체가 1백20여개로 늘어날 정도로 상승세를 타고 있다. 이미 6개 매장을 냈고 다음달에 두곳을 더 오픈할 예정.
참여 업체들은 지난 1년동안 브랜드의 「대단한」 위력을 실감했다.
『소비자들이 「우진가구」 「디앤드가구」는 몰라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잘 알아요. 이제 제대로 된 우리의 얼굴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이들의 이구동성이다.
이사업체 브랜드인 「코끼리」는 전국 52개사의 공동상표다. 52개 업체의 전화번호는 한 개로 통일돼 있다. 각 업체가 담당지역을 나눠맡아 수요자가 전화를 걸면 송신 지역내 업체로 자동 연결된다. 이런 방식으로 「코끼리」는 전국적인 지역 대리점망을 갖춘 효과를 얻고 있다.
인건비와 교통비를 절감, 가격 인하도 할 수 있었다.
「코끼리」를 주도한 삼호 익스프레스의 정환창(鄭煥昌)사장은 『외국의 대형 이사업체들이 대거 밀려오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선 국내 영세 업체들끼리 힘을 모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인천지역의 8개 양식기 업체들도 「로자리안」이라는 공동브랜드로 해외시장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이들 업체는 중국 태국 말레이시아 등 후발 개도국에 해외시장을 잠식당하자 『외국인이 느끼기에 어감이 좋은 상표를 만들어 보자』는데 뜻이 맞았다.
「로자리안」은 지난 1월 미국 시카고 생활용품 박람회에 참가하는 등 국제시장에서 당당히 명함을 내밀고 있다.
국내 공동브랜드의 선두주자는 「가파치」. 14개 업체가 연합한 피혁 브랜드로 77년 설립된 기호상사가 모태. 기호상사는 당초 가죽벨트를 임가공하는 가내 수공업체로 출발했다. 차츰 소문이 나면서 「우리나라에서 벨트를 가장 잘 만드는 회사」라는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가장 큰 고객이던 한 재벌회사가 거래를 일방적으로 끊어 자금난에 부닥쳤다. 기호는 자체상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가파치」를 생각해냈다. 또 「가파치」를 다른 중소업체에도 개방, 공동상표로 사용함으로써 「토탈 상표」로서의 이미지 메이킹 전략을 폈다. 돈을 걷어 공동광고를 내는 등의 공동마케팅 전략은 보기좋게 적중했다. 그 결과 지금은 ㈜CCC라는 상표관리 전담회사를 설립해 브랜드의 「품질관리」에 나설 만큼 성공 브랜드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공동브랜드가 이렇게 「장밋빛」 일색인 것만은 아니다. 신발 브랜드 「귀족」은 실패 사례. 지난해 한국신발공업협동조합이 내놓은 「귀족」은 또하나의 성공케이스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지만 방만한 경영과 조합원들간 불협화음이 겹치면서 몇달 못가 쓰러지고 말았다. 공동브랜드 성공의 열쇠인 시너지효과 창출에 실패한 탓이다.
〈이명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