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역의 지난달 어음부도율이 사상 처음으로 0.46%를 기록했다. 82년 장영자(張玲子)사건 당시의 부도율 0.29%를 훨씬 웃돌아 기업들이 최악의 부도사태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음 부도액은 올 들어 9월까지 16조1천억원, 하루 평균 50개 회사가 도산했다. 연말에 가면 부도액이 22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도 정부는 뾰족한 대책이 없다며 손을 놓고 있고 금융시장 불안은 개선의 기미가 없으니 안타깝다.
대량부도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대기업들이 부도 또는 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연관 중소기업들이 무더기로 쓰러지고 있다. 이 와중에 거액의 부실채권을 안게 된 금융기관들이 대출을 꺼리자 자금시장이 마비상태에 빠져 건실한 기업까지 자금난에 시달리는 실정인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자금난 루머가 시도 때도 없이 퍼져 기업들이 애를 먹는다. 건전기업을 부도공포에서 해방시키는 일이 시급하다.
경제체질 강화를 위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경쟁력이 없는 기업의 도태는 당연하다. 그러나 문제는 금융기관에 돈이 넘쳐도 기업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거래기업이 조금만 어려워져도 무자비하게 목을 죄는 금융기관의 자금운용이 부도를 부추기고 금융시스템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부도까지 가지 않아도 될 건실한 기업마저 도산으로 몰고가는 금융행태는 조속히 시정되어야 한다.
연초부터 계속된 금융시장 마비상태를 방치해온 정부 책임도 크다. 한보 기아 등 대기업 부도사태에 정부가 원칙 없이 갈팡질팡하면서 수습을 지연해 금융혼란을 초래했다. 금융기관들이 손실을 줄이기 위해 지나치게 경직적으로 자금운용을 하는 것도 문제지만 금융시장 전반의 안정을 유도하는 데는 지금이라도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 정부가 금융시스템의 정상화에 조정기능을 발휘하고 왜곡된 자금 흐름을 바로잡는 일은 시장개입이나 관치금융과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