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그룹이 부도나기 5개월 전인 작년 8월하순. 한 시중은행의 지점장회의에서 Z은행장은 회람을 돌렸다. 「한보그룹에 대한 추가 기표(추가 대출)는 일절 없다. 돈을 더 내주는 지점장은 문책한다」.
鄭泰守(정태수)한보그룹 총회장이 관계 요로에 막강한 줄이 있고 이미 수조원의 금융권 돈을 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지점장들에게는 「폭탄선언」이었다. 그후 Z행장은 『당신이 한보 대출을 무조건 줄이라고 했느냐』는 여러 곳의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작년 11월말 Z행장은 비서로부터 전화를 돌려 받았다.
『나 한보 정회장이오. 저녁합시다』
『바빠서 안되겠습니다』
『그럼 점심합시다』
『안되겠습니다』
정씨는 며칠 뒤 불쑥 행장실로 찾아왔다. Z행장은 담당 전무와 상무를 배석시킨 가운데 대출 청탁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다시 집으로 전화가 왔다.
『저녁 한번 하자는데 안될 거 뭐 있소. 듣자니 당신이 「한보에 돈주지 말자」고 얘기하고 다닌다는데…』
Z행장은 정씨와 통화하면서 크게 싸웠다.
최근에서야 그는 『솔직히 정씨가 훼방을 놓는다면 연임을 못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른 은행처럼 물려들면 은행을 망치겠다는 압박감이 더 심했다』고 당시의 심경을 밝혔다.
한보뿐만이 아니다. 은행의 여신담당 임원들은 『정계의 실력자나 재정경제원의 영향력 있는 고위 관료를 등에 업은 대기업은 일단 총대출금이 일정액 이상 되면 꼭 큰소리를 쳐댄다』고 입을 모은다.
Z행장의 경우는 그나마 「도박같은 선택」이 성공한 케이스.
한보는 결국 제일은행의 李喆洙(이철수) 申光湜(신광식)전 행장과 조흥은행의 우찬목 전 행장 등 3명의 고위 은행가를 감옥으로 보냈다.
30년 이상 은행에 근무한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오르고 싶은 행장 자리. 그러나 「행장실은 서울구치소와 담벼락 하나 사이」라는 웃지못할 우스갯소리가 금융계에 나돌고 있다.
어떻게 오르는 행장인가. 과거에는 둘 이상의 명단이 청와대에 올라간 뒤 낙점(落點)받은 인물이 선임됐다는 「정설」을 현직 행장들도 부인하지 않는다. 또 간부들은 행장에게 영향력 있는 인물을 찾아 임원 선임과 연임을 청탁해온 게 관례.
이 때문에 시중은행 인사철의 은행가는 정치권 재경원 은행감독원 등에 대한 「줄대기」러시를 이룬다. 한 시중은행 간부는 『감독당국이나 재경원에 밉게 보이면 인사 불이익 뿐 아니라 지점신설 해외영업에 곧바로 주름살이 오기 때문에 고개 쳐들고 나설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며 『은행은 법상으로는 주식회사지만 현재의 구조하에서는 정부가 영원한 대주주』라고 말했다.
일단 행장이 되면 「신세갚기」에 나선다. 외부의 전화 한 통에 거액 대출이 결정되는 것도 그런 사례다. 실무진이 아무리 『심사해본 바 거액대출은 곤란하다』고 보고해도 『되는 방향으로 서류를 꾸며보라』는 지시가 비일비재였다.
한보청문회 막바지, 朴錫台(박석태)전 제일은행상무의 죽음은 「노(NO)라고 말할 수 없었던 은행원들의 가슴에 쌓인 한」을 대변하는 사건이었다.
「한보태풍」이 곳곳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간 금융계에 종전의 관행이 더 이상 통할 수 없고 통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퍼지고 있다. 일부 은행이 도입하고 있는 여신심사위원회도 그 중의 하나다. 은행별로 다르지만 50억∼3백억원 이상의 거액대출 여부는 전무(위원장) 등 10여명의 실무라인이 모여 심사한다. 행장은 열외다. 참석자들이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 찬반의사를 밝히도록 돼 있고 기록이 남기 때문에 일사천리식 대출결정은 크게 줄고 있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위원회는 행장의 거액 대출권을 빼앗는 것이기보다 압력성 또는 청탁성 대출을 회피할 수 있는 방패막이』라고 풀이했다.
지난 93년부터 도입된 행장추천위원회는 행장 선출시 정부의 직접적인 입김은 막아주고 있지만 여전히 미흡한 것으로 지적된다. 올 2월부터 주주대표 비상임이사들만으로 구성되고 있지만 비상임이사들의 지분을 모두 합쳐 봐야 고작 4∼8%여서 대표성이 부족하고 이들이 대부분 해당은행 거래업체 임원들이어서 공정한 추천이 안된다는 것.
한 금융개혁위원회 관계자는 『은행이 외압에서 벗어나려면 정치권과 정부가 「은행은 기업」이라는 인식을 해야 하며 행장과 임원들의 선임 및 연임이 관의 입김이 아닌 경영실적에 의해 판가름나도록 진정한 경영평가제도가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희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