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은 래퍼 ASAP Rocky, 오른쪽은 제이슨 기암피. 둘 다 쿼터집 스웨터를 입고 있다. 인스타그램 @voguephilippines 갈무리
“단정한 칼라의 스웨터에 뿔테 안경, 한 손에는 말차 라떼와 자기개발서”
얼핏 보면 성공한 투자자 같지만, 최근 틱톡과 거리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20대 남성들의 모습이다. 최근 Z세대(1996~2006년 출생) 남성들은 후줄근한 스트릿웨어를 벗어던지고 ‘쿼터집 스웨터’를 입기 시작했다.
쿼터집(Quarter-Zip)은 목에서 가슴의 약 4분의 1까지만 지퍼가 달린 스웨터나 재킷이다. 단추를 채우는 폴로 셔츠와 비슷하지만 지퍼를 활용해 깃의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인스타그램에 쿼터집(Quarter-Zip)을 검색한 결과. 여러 남성이 쿼터집 스웨터를 입은 사진을 게시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갈무리이 옷은 오랫동안 골프웨어 혹은 월스트리트 ‘금융맨’들의 상징이었다. 셔츠 위에 입으면 격식을 갖춘 듯 보이면서도 활동성이 좋아 실용적인 비즈니스 캐주얼의 대명사로 통했다.
특히 정장처럼 비싸거나 불편하지 않으면서 격식을 갖출 수 있어 사회초년생에게 인기가 높다. 실제로 최근 영국 백화점 체인 존 루이스(John Lewis)에 따르면, 올해 남성용 쿼터집 스웨터의 검색량은 전년 대비 425% 폭증했다.
● “트레이닝복은 가라… 격식과 우아함이 성인들의 방식”
쿼터집 스웨터를 입고 있는 제이슨 기암피의 모습. 인스타그램 갈무리이 트렌드의 중심에는 평범한 21세 대학생 제이슨 기암피가 있다. 그는 영상을 올려 “더 이상 트레이닝복을 입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쿼터집 스웨터를 매만지며 “대신 우아하고 격식 있는 옷을 입겠다. 이게 성인들의 방식”이라 강조했다. 해당 영상은 3080만 조회수를 넘기며 엄청난 화제가 됐다.
이처럼 ‘안전한 성인 남자’를 강조하는 쿼터집 유행은 Z세대 남성의 라이프스타일 전반으로 확장 중이다. 온라인에 ‘쿼터집 스웨터’를 인증하는 청년들은 영미권 지적 남성의 상징인 ‘말차 라떼’나 ‘자기계발서’를 들고 다니며 지적인 이미지를 뽐낸다.
현지에서는 이를 ‘링크드인(LinkedIn) 코디’ 혹은 ‘퍼포남(Performative male)’이라 부른다. 단순한 멋이 아니라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성공, 그리고 자기 관리를 통한 ‘멋진 남성상’을 과시하는 방식이다.
● 패스트푸드점부터 명품 브랜드까지… ‘쿼터집’ 열풍
미국 패스트푸드 체인 ‘웬디스’의 마스코트가 쿼터집 스웨터를 입고 있다. 인스타그램 갈무리기업들도 이 흐름에 즉각 반응했다. 미국 패스트푸드 체인 웬디스는 자사 마스코트에 쿼터집 스웨터를 입히고 ‘쿼터 십(Quarter Sips)’ 프로모션을 선보였다. 명품 브랜드 샤넬 역시 새 컬렉션 오프닝에 쿼터집 스웨터를 올렸다.
구글 검색량 또한 2025년 한 해 동안 2250% 가량 상승했으며, 특히 ‘폴로 랄프 로렌’의 쿼터 집업이 가장 많이 검색된 것으로 나타났다.
● 편견에 저항하는 Z세대의 ‘생존 수단’
미국 길거리 패션(스트릿웨어)를 상징하던 나이키 테크(Nike Tech) 옷차림의 모습. 나이키 테크를 즐겨 입는 사람들은 자신을 테크 갱(Gang)이라며 옷차림을 뽐냈다. 핀터레스트 갈무리쿼터집 유행의 이면에는 유색 인종을 향한 ‘범죄자’ 이미지에 대한 저항도 담겨 있다. 그동안 흑인 청년들이 즐겨 입던 나이키의 ‘테크팩 후드티’는 영화·드라마를 통해 범죄자가 입는 옷이라는 편견이 생겼다.
평소 테크팩 후드티를 즐겨 입었다던 16세 소년 올라 아담스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옷차림 하나로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은연중에 깔려 있는 편견이 ‘안전해 보이는 옷차림’만으로 상당수 해소된다는 것이다.
영국 비행 청소년 집단 차브(Chav)의 상징과도 같은 버버리의 체크무늬 스타일. 인스타그램 @kaivyon 갈무리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인종차별의 피해자가 도리어 가해자에게 맞춰 변해야 한다는 ‘존경성 정치’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런던예술대 연구원 리자 베츠는 “옷차림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옷차림이 어떠하건 사람에 따라 이미지가 판이하게 바뀌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 영국 비행 청소년 사이 유행했던 ‘차브족(Chav)’들은 버버리·스톤 아일랜드 등 명품 브랜드를 둘렀지만, 도리어 브랜드의 이미지가 나빠지기도 했다. 베츠는 “같은 옷이라도 입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며 반드시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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