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어디라고 빛과 어둠이 없을까. 2025년 한국 문화계는 유독 그 명암이 선명하게 엇갈렸다. 눈이 아릴 정도로 화려한 성과가 쏟아지면서도, 가슴이 묵직해지는 사건 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K컬처의 승전보는 찬란했다. 여름을 앞두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등장한 만화영화는 한 해가 저무는 지금도 우렁찬 사자후를 터뜨리고 있다. 꽤 괜찮은 작품으로 여겨지던 K뮤지컬 한 편은 세계적인 미국 공연계 최고의 시상식을 휩쓸어 버렸다. 제주가 배경인 토속적인 드라마가 세계인의 눈언저리를 붉게 물들였고, 돌아온 ‘원톱’ 여성 걸그룹은 세상을 “뛰어”다니며 대기를 들썩였다.
하나 새옹(塞翁)의 말은 올해도 뒤뚱거렸다. 과거에, 혹은 처신에 발목이 잡힌 스타들은 화마에 휩싸인 채 떠나거나 깊이 가라앉았다. 지난해부터 다툼이 이어졌던 샛별 같던 아이돌은 끝내 완전체로 돌아오지 못했다. 국민 할배도, 한국의 리즈 테일러도, 개그맨 창시자도 창공의 별로 돌아갔다. 병오년(丙午年)의 붉은 말은 또 우리를 어디로 태우고 갈까.
❶ ‘헌트릭스’ 활약에 김밥-저승사자 K컬처 일상화
세계적인 신드롬을 불러온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가상 걸그룹 ‘헌트릭스’. 이들이 부른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 대표곡 ‘골든’은 8주 동안 미 빌보드 차트 ‘핫 100’ 1위에 이름을 올렸다. 넷플릭스 제공
2025년 올 한 해 문화계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광풍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가 없다. 해외에서 더 뜨거웠던 케데헌 신드롬은 이제 K팝을 근간에 둔 K컬처가 세계 시장의 주류(mainstream)로 올라서고 있음을 보여줬다. 특히 넷플릭스 사상 최초로 누적 시청 수 3억 회를 돌파하며, K컬처의 아이콘이나 다름없던 ‘오징어 게임’마저 넘어선 건 충격에 가까웠다. 김밥이나 라면, 저승사자 등 디테일한 한국 문화를 선보여 세계 속 K컬처의 ‘일상화’를 이끌었단 평가도 나온다.
케데헌 오리지널 사운드트랙(OST)의 인기도 상상을 초월했다. 타이틀곡 ‘골든’은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핫 100’에서 도합 8주 동안 1위를 기록했다. 이 차트에서 가상 아이돌이 1위를 차지한 것도, 여성 가수가 부른 K팝이 정상에 오른 것도 처음이었다. 연출자인 매기 강 감독은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2월 옥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❷ 완전체로 솔로로 지구촌 무대 달군 ‘블랙핑크’
걸그룹 ‘블랙핑크’. YG엔터테인먼트 제공하반기 가상 아이돌 ‘헌트릭스’에 살짝 밀린 감은 들지만, 올해 K팝의 위너는 블랙핑크였다. 탄탄한 실력으로 무장한 걸그룹이 솔로 아티스트로의 행보와 완전체 그룹 활동을 완벽하게 교직하는 모습은 향후 ‘K아이돌의 모범 사례’라 불러도 과하지 않았다.
미 빌보드 ‘핫100’에 무려 56주나 머물렀던 로제의 ‘아파트(APT.)’는 특히 백미였다. 내년 2월 열릴 그래미 어워즈에 ‘올해의 노래’ 등 3개 부문 후보로도 오르며 하얗게 쌓인 눈 위로 첫 발자국을 새겼다. 탁월한 음악성이 돋보인 제니의 첫 정규 앨범 ‘루비(Ruby)’는 미 롤링스톤이 선정한 ‘2025년 최고의 앨범’ 29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룹 활동의 파괴력도 놀라웠다. 7월 신곡 ‘뛰어(JUMP)’를 발표한 뒤, K걸그룹 최초로 ‘꿈의 공연장’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단독 콘서트를 가졌다. 벌써부터 올해 전원 전역한 ‘황제테란’ 방탄소년단(BTS)과 함께 빚어낼 쌍두마차의 활약이 기다려진다.
❸ 브로드웨이도 열광 K뮤지컬 ‘확실히 해피엔딩’
올해 미국 토니상 6관왕을 차지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뉴욕 브로드웨이 버전 공연. 2016년 한국의 300석 규모 소극장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K팝과 K드라마에 이어 K뮤지컬이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NHN링크 제공이젠 ‘확실히 해피엔딩(Absolutely Happy Ending)’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미국 토니상 6관왕 등극은 글로벌 무대에서 K팝과 K드라마만 주인공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했다. 6월 ‘미 공연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시상식에서 무려 10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입이 벌어지게 하더니, 작품상과 연출상 등 6개 부문을 석권하며 결국 턱까지 빠지게 만들었다. 각본과 작사를 맡은 박천휴 작가는 토니상을 수상한 첫 한국인이란 기록도 세웠다.
2016년 300석짜리 소극장에서 출발한 이 뮤지컬이 지난해 뉴욕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하며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갈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미 워싱턴포스트(WP)는 “한국적 기발함(quirky)에 보편적 인간애를 녹여낸 작품이 현지화 전략에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결국 누구나 공감할 내용을 맛깔스럽게 버무리라는 얘기. 그러니까, ‘잘’ 만들면 된다.
❹ 제주 감성 ‘폭싹 속았수다’에 국내외 눈물 펑펑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넷플릭스 제공4년 동안 세상을 뒤흔들던 왕의 마지막 무대는 왠지 씁쓸했다. 6월 마지막 시즌3를 공개한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K컬처 역사책에서도 언급될 이름이다. 2021년 9월 첫 시즌 공개 뒤 이듬해 미국 방송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에미상’에서 6관왕을 차지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이들이 거액을 품으려 목숨 건 게임을 벌인다는 설정은 팬데믹 이후 지구에 울려 퍼진 ‘우울한 팡파르’와도 같았다.
다만 물러섬의 미학이 그리 개운치는 않았다. 시즌3는 대놓고 혹평을 받을 정도는 아닐지라도, 기립박수를 보낼 짜임새도 아니었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올해 방영작 기준으로 선정한 ‘2025 베스트 K드라마’ 순위에서도 겨우(?) 3위에 머물렀다.
1위는 ‘폭싹 속았수다’였다. 올 3월 공개된 이 넷플릭스 드라마는 글로벌 톱10 TV쇼 부문에서 9주 연속 이름을 올렸다. 1950년대 제주에서 태어난 애순과 관식의 일생을 사계절에 빗대 풀어낸 ‘문예적인’ 작품이 전한 교훈은 뭘까. 역시, ‘잘’ 만들면 된다.
❺ 꽃할배-트로트 천왕-개그 전도사 하늘 무대로
올해도 별은 또 졌다. 이별은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영원한 현역’일 줄 알았던 이순재 배우는 지난달 25일 91세로 우리 곁을 떠나갔다.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허준’,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예능 ‘꽃보다 할배’ 등 70년 가까이 TV와 영화, 연극 무대를 넘나들던 고인의 열정. 투병 중에도 마지막까지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대본을 놓지 않았다는 그의 성실함은 천국에서도 빛나지 않을까.
잊혀지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다. 2월엔 ‘트로트 4대 천왕’ 가수 송대관이 떠났고, 10월엔 ‘개그맨’이란 말을 처음으로 만든 방송인 전유성이 작고했다.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로 불렸던 배우 김지미도 이달 미국에서 유명을 달리했으며, 1세대 연극 스타 배우 윤석화도 연이어 영면했다. 앞서 9월엔 ‘선댄스 키드’ 배우 로버트 레드퍼드의 별세 소식도 영화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❻ 관람객 600만명 ‘국중박’ 박물관 세계 4위 우뚝
관람객 600만 명을 돌파한 국립중앙박물관. 뉴시스‘어쩌면 케데헌 덕?’ 올해 국립중앙박물관은 K컬처의 인기와 ‘뮷즈’(박물관 문화상품)의 히트에 힘입어 사상 처음으로 연간 관람객 600만 명을 넘어섰다. 관람객 수만 따지면 세계 박물관 4위에 해당하는 성과다. 여기에 전국 12개 국립박물관을 합치면 누적 관람객 수는 1380만여 명. 국립현대미술관의 누적 관람객 수 역시 337만 명(20일 기준)을 넘으며 개관 이래 최다 기록을 세웠다. 20, 30대 방문객이 전체의 63.2%를 차지했으며, 외국인 관람객은 21만 명으로 전체 관람객의 6.3%였다.
다만 이러한 열기를 내년에도 지속할 수 있을지는 아직 확언하기 어렵다. 문화유산 전문가들은 “전시 질 향상과 관람 환경 개선, 소장품 관리 역량 강화 등의 과제를 해결해야 중장기적으로 인기를 이어갈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감나무 밑에 누워 홍시 떨어지길 기다려선 안 된다는 소리다.
❼ 연예계 덮친 주사이모-소년범-조폭 연루 논란
12월 연예계를 강타한 사자성어는 ‘주사이모’ 아닐까. 이달 초 개그우먼 박나래 씨로부터 피어오른 불씨는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전 매니저들에 대한 ‘갑질’ 논란 등으로 시끄럽더니, 결국 불법 의료행위 의혹은 샤이니 키(본명 김기범)와 유명 유튜버 입짧은햇님(본명 김미경)까지 파장을 미쳤다. 이들은 모두 고개 숙이고 방송 중단을 선언했다. 개그맨 조세호 씨도 조직폭력배 연루설이 불거진 뒤 출연 프로그램들에서 하차했다.
배우 조진웅(본명 조원준) 씨는 아예 은퇴를 선언했다. 30여 년 전 청소년 때 강력범죄 이력이 있다는 의혹 제기가 나온 지 하루 만에 내린 결정이었다. 정치계로도 옮겨 붙은 이번 논란은, 범죄 정보를 공개하지 못하도록 한 소년법 취지에 어긋난다는 지적과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줬다면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❽ 돌아온 하니 떠난 다니엘, 완전체 깨진 뉴진스
걸그룹 ‘뉴진스’. 어도어제공우리가 알던 뉴진스는 이제 사라졌다.
지난해 11월부터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던 ‘뉴진스 사태’는 1년여의 세월을 날린 채 완전체 복귀가 물거품이 됐다. 당시 소속사 어도어와의 전속계약 해지를 선언하며 법적 분쟁에 들어갔던 뉴진스는 10월 1심 법원이 어도어의 승소 판결을 내리며 끝을 맺는 듯했다. 지난달 해린과 혜인이 공식 복귀를 선언했고, 나머지 셋도 돌아올 뜻을 밝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던 상황은 결국 분열로 치달았다. 어도어는 29일 하니의 복귀를 발표하며 다니엘의 전속계약 해지도 결정했다. 민지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는 입장이나, 4세대 걸그룹의 정점이던 5인조 걸그룹은 이제 볼 수가 없게 됐다.
향후 행보도 관심이다. 2022년 데뷔해 K팝 판도를 바꿨다는 찬사를 들었던 뉴진스는 과거의 가공할 화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이래저래 핫한 걸그룹이다.
❾ 다섯 번 방한 교황 레오 14세, 2027년 또 온다
4월 21일(현지 시간) 신대륙 국가(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처음 교황에 올랐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했다. 보름여 후인 5월 8일 제267대 교황에 오른 레오 14세도 미국 출신. 연이은 비(非)유럽계 교황의 배출은 교황청이 더는 과거의 관습과 권위에 머무르지 않고, 복음의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내적 쇄신의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두 교황 모두 한국과 인연이 깊다. 역대 교황 중 한국을 방문한 건 1984년 5월 요한 바오로 2세와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뿐이다. 2023년 9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 동양인 성인 최초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성상이 세워진 건 이런 인연이 작용한 덕으로 알려졌다. 레오 14세는 2001년부터 12년간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총장으로 다섯 차례나 방한했다. 2027년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청년대회(WYD) 참석을 위해 다시 한번 한국을 찾을 예정이다.
❿ 장관급 오른 K팝 사령관… 국가 핵심동력으로
9월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창의성총괄책임자(CCO) 겸 대표 프로듀서가 대통령 직속 대중문화교류위원회 공동위원장(장관급)에 임명된 건 K컬처의 달라진 위상을 드러낸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현역 뮤지션인 그의 임명은 K컬처를 단순히 지원과 진흥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 핵심 성장 동력’으로 보겠다는 정부의 메시지로도 읽히고 있다.
박 위원장은 K팝이 아직 북미 시장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2000년대 초반부터 적극 도전했던 경험이 공동위원장 발탁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위원장은 임명 당시 “K팝이 세계가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하는 장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내년부터 본격 가동되는 대중문화교류위가 화제성을 넘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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