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국감보다 더 긴장돼… ‘나 아직 죽지 않았어’ 대사 좋았죠”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2월 17일 03시 00분


46년만에 연극무대 선 이영훈 前 국립중앙박물관장
화동연우회 ‘바람의 용사들’ 출연… 경기고 연극반 출신, 대학 때도 주연
1979년 마지막 무대 후 박물관 입사… “연극-박물관 전시 다 상호작용 중요”

연극 ‘바람의 용사들’에서 퇴역 장교 필립 역을 연기하는 이영훈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화동연우회 제공
연극 ‘바람의 용사들’에서 퇴역 장교 필립 역을 연기하는 이영훈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화동연우회 제공
“저 위로 가자. 포플러가 있는 곳, 바람이 부는 곳. 우리 좀 영웅적으로 살자.”

1959년 프랑스의 한 퇴역 군인 요양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장교로 활약했던 참전용사 ‘필립’(이영훈)은 눈빛에 들뜸과 미련이 섞여 있었다. 그러자 전쟁터에서 다리를 크게 다친 뒤 불안을 겪는 친구 ‘앙리’(최용민)는 “네 처지를 좀 돌아봐. 난 산책이나 간다”며 쌀쌀맞게 거절한다. 하나 그 목소리엔 누구보다 모험을 바라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예극장에서 12일부터 열리고 있는 화동연우회의 32번째 정기 공연 ‘바람의 용사들’ 연습 현장을 10일 찾았다. 퇴역 장교 필립 역을 맡은 배우가 이영훈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라 화제가 된 작품이다. 그가 무대에 서는 건 1979년 ‘우리들의 저승’ 이후 약 46년 만. 이날 이 전 관장은 “국정감사보다 더 긴장되는 게 연기”라며 “작품에 출연하기로 한 걸 후회막심할 정도로 부담감이 크다”고 소회를 밝혔다.

‘바람의 용사들’은 노인이 된 세 참전용사 필립과 앙리, 구스타프(이우종)의 요양원 탈출기를 재기발랄한 대사와 따스한 유머로 풀어낸다. 프랑스 극작가 제랄드 시블리라스가 쓴 희곡 ‘포플러에 부는 바람’이 원작. 제25회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수상한 김광림 연출가 겸 극작가가 예술감독으로 참여했다.

이른바 ‘국중박’을 포함해 경주와 부여, 청주, 전주 등 여러 국립박물관 수장을 지냈던 이 전 관장의 연기 재도전은 무척 이례적이고 신선하다. 하지만 연극과의 인연은 경기고 연극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연우무대의 1977년 창단공연 ‘아침에는 늘 혼자예요’에선 서울대 재학 중 주연을 맡기도 했다.

“다른 세계,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어 연극이 좋았어요. 1982년 박물관에 입사하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멀어졌죠.”

짧지만 강렬했던 연극 인생은 ‘박물관 사람’으로서 가지를 뻗게 하는 양분이 됐다고. 국중박의 조선 왕실 관련 소장품이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대거 이전됐던 2004년, 당시 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던 이 전 관장은 유물이 빠진 약 80평 공간에 두 반가사유상을 사상 처음으로 나란히 전시해 주목받았다. 이 전 관장은 “연극도 박물관 전시도 공간감과 상호작용이 중요하다”며 “학창 시절 연극을 하면서 그 감각이 체화된 것 같다”고 했다.

이날 연습에서 이 전 관장은 김 감독의 따끔한 지적에 진땀을 빼기도 했다. 1991년 결성된 화동연우회는 가수 겸 연출가 김민기와 비디오아트 거장 백남준, 배우 이낙훈 등 거목들이 거쳐 갔다는 사실이 주는 무게감도 적지 않을 터. 김 감독은 넌지시 “옛날부터 꾀부릴 줄 모르던 사람”이라고 귀띔했다.

이 전 관장은 ‘바람의 용사들’에서 어떤 대사를 가장 좋아할까. 그는 “나 아직 끝난 건 아니야. 죽지 않았어”를 꼽았다.

“요즘 제 나이면 정말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일본학과 학부 4학년 과정을 마무리하고 있고 붓글씨랑 그림, 드럼도 배우고 있어요. 관객에게도 ‘바람의 용사들’이 느끼는 희망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달 21일까지.

#이영훈#바람의 용사들#대학로 한예극장#화동연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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