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던 방송인에서 ‘운동쟁이’로 돌아온 장재근 “선수촌장 꿈 이뤄 행복”[이헌재의 인생홈런]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2월 9일 12시 00분


에어로빅 강사 겸 방송인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장재근의 모습. 동아일보 DB
에어로빅 강사 겸 방송인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장재근의 모습. 동아일보 DB
장재근 진천선수촌장(62)은 1980년대 한국 최고의 스프린터였다. 1982년 뉴델리,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 육상 남자 200m에서 두 대회 연속 금메달을 땄다. 한국 신기록을 4번, 아시아 신기록을 2번이나 갈아 치우며 ’아시아 단거리 황제’로 군림했다.

원체 타고난 신체조건도 좋았지만 정신력도 강했다. 여기에 치열한 훈련까지 더해져 체력적으로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아시아의 육상 강국은 일본이었다. 장재근의 생각은 “무조건 일본 선수는 잡는다”는 것이었다. 육상 200m는 이틀에 걸쳐 예선과 준결선, 그리고 결선을 치렀다. 메달을 바라보는 선수들은 예선과 준결선에서는 대개 페이스를 조절한다. 하지만 장재근은 달랐다. 초반부터 앞만 보고 달렸다. 그는 “예선부터 일본 선수한테는 지기 싫더라. 그래서 출발 총성이 울리자마자 초반부터 치고 나갔다. 그런데 그게 먹혔다”며 “일본 선수가 나를 신경 쓰느라 예선부터 자기 페이스를 잃었다. 워낙 훈련량이 많다 보니 나도 그걸 버텼던 것”이라며 웃었다.

장재근(왼쪽)이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육상 남자 200m에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뒤 환호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장재근(왼쪽)이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육상 남자 200m에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뒤 환호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장재근은 또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출전한 ‘올림피언’이기도 하다. 장재근의 작전은 아시안게임 때와 같이 ‘초반부터 조지기’였다.

하지만 세계 무대에서 이 작전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상대 선수가 당대 최고의 스프린터이던 칼 루이스(미국)와 벤 존슨(캐나다) 등이었기 때문이다. 장재근이 초반부터 스퍼트를 하건 말건 이들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장재근은 그래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준준결선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장재근은 “아시아 무대에선 날다 긴다 했을지 몰라도 세계적인 선수들은 말 그대로 ‘어나더 레벨’이었다. 칼 루이스 같은 선수는 경기 때뿐 아니라 평소에도 세계 일인자로서의 여유로움이 넘쳤다”며 “그 선수들은 인격적으로도 훌륭했다. 평소 안면이 많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건네곤 했다”고 말했다.

장재근 진천선수촌장이 진천선수촌 내 오륜기 조형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양회성 기자

1990년 은퇴 후 그는 트랙을 벗어나 한동안 ‘외도’를 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에 물 흐르는 듯한 언변을 앞세워 방송계로 진출한 것이다. 에어로빅 강사로 인기를 모았고, 예능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홈쇼핑 호스트로도 얼굴을 내밀었다.
짧은 기간에 운동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속은 편하지 않았다. 장 촌장은 “가장이다 보니 돈을 더 벌 수 있는 방송 쪽 일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트랙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간절해졌다”고 했다. 어느 날 그는 아내에게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는 “아내는 막고 싶은데 ‘내가 육상을 얘기할 때 얼굴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하지 말라고 못 하겠더라’고 했다”며 웃었다.

하지만 나갈 때는 쉬웠지만 들어오는 건 쉽지 않았다. “돈 보고 떠난 놈이 배고픈 동네에 뭐 먹을 게 있다고 돌아오느냐”는 게 육상계의 분위기였다. 감독, 코치 등 지도자가 아닌 심판으로 다시 육상의 문을 두드렸다. 하루 육상 대회 심판을 보면 일당 5만 원을 받았다. 딱히 일이 없을 때면 육상장 주변 편의점에서 육상 지도자들과 시시콜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2, 3년을 지낸 후에야 다시 육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마흔이 되기 전이었다. 누구에게 고개를 숙여도 부끄럽지 않을 때였기에 육상계 복귀가 가능했던 것 같다”고 했다.

늘씬한 키에 헌칠한 얼굴의 장재근은 한 공중파 예능프로그램의 MC로도 활동했다. 동아일보 DB
늘씬한 키에 헌칠한 얼굴의 장재근은 한 공중파 예능프로그램의 MC로도 활동했다. 동아일보 DB

이후 국가대표 코치, 육상연맹 트랙기술위원장, 실업팀 감독 등을 거친 그는 2023년 3월 꿈에 그리던 진천선수촌장을 맡았다. 그의 롤모델은 ‘영원한 선수촌장’으로 기억되고 있는 김성집 전 촌장(1919~2016)이었다.

김성집 전 촌장은 1948년 런던 올림픽 역도 미들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해 대한민국 수립 후 최초로 올림픽 시상대에 오른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해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두 대회 연속 메달을 목에 걸었다.

선수에서 은퇴한 후로는 행정가로 변신했다. 특히 1976년부터 1994년까지 중간에 다른 직책 맡은 기간 빼고 13년 7개월 동안 태릉선수촌장으로 국가대표 선수들을 육성하는데 힘썼다. 태릉선수촌장 시절 선수들에게 공포이었던 불암산 크로스컨트리를 활성화시켰다.

지난해 파리 올림픽 한국 대표팀 전초기지였던 퐁텐블로에서 인터뷰하는 장재근 진천선수촌장. 동아일보 DB
지난해 파리 올림픽 한국 대표팀 전초기지였던 퐁텐블로에서 인터뷰하는 장재근 진천선수촌장. 동아일보 DB

김 전 촌장은 ‘호랑이’, ‘염라대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한편으로는 선수들에게 자상하고 따뜻한 어른이기도 했다. 장재근은 “김 촌장님에 대한 기억 대부분은 욕먹은 것밖에 없다. 젊은 혈기에 태릉선수촌 담장을 뛰어 넘어 놀러 나가곤 했는데 촌장님한테 걸리면 엄청 혼났다. 반성문도 여러 번 썼다”며 웃었다. 그는 “하지만 김 촌장님은 선수촌을 어떤 외부의 압력이나 기운에도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신 분이었다. 그분이 계실 땐 누구도 선수촌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하지 않았다”며 “그렇게 온몸으로 선수와 지도자를 막아주신 덕분에 선수들은 마음 놓고 훈련만 할 수 있었다. 그분이 안 계셨다면 ‘스프린터 장재근’도 오늘날 한국 체육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재근 촌장이 2011년 대구육상세계선수권대회에 앞서 우사인 볼트의 세리머니를 흉내내고 있다. 동아일보 DB
장재근 촌장이 2011년 대구육상세계선수권대회에 앞서 우사인 볼트의 세리머니를 흉내내고 있다. 동아일보 DB

김 전 촌장처럼 장재근도 진천선수촌장으로서 최대한 선수들과 함께 하려 노력했다. 논란 속에서도 오전 6시 새벽 산책을 부활시킨 것도 같은 이유다. 그는 “힘든 오전 훈련을 소화하려면 일찍 일어나서 아침밥을 먹고 시작해야 한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게 사람이다”라며 “자발적으로 잘하는 선수도 있지만 어떤 선수들은 끌고 가줘야 한다. 더구나 선수촌은 국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 아닌가. 적어도 선수촌에 들어왔다면 누가 봐도 지켜야 할 것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새벽부터 선수들의 훈련이 끝나는 저녁까지 선수촌을 지켰다. 훈련이 끝난 뒤에는 각 종목 지도자들과 저녁 자리를 갖고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오후 9시 이후엔 혼자 트랙을 뛰거나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며 건강을 다졌다. 그렇게 그는 2년간 엘리트 스포츠 부흥을 위해 앞만 보고 뛰었다.
다행히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 한국 선수단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50명) 이후 가장 적은 144명의 선수가 출전했는데 역대 최다 타이인 13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은 9개, 동메달 10개 등 전체 메달은 32개를 기록했다. 그는 “선수촌은 한국 엘리트 체육의 마지막 보루이자 성지다. 최선을 다해 좋은 성적을 내준 우리 선수들에게 너무 고맙다”고 했다.

진천선수촌 조형물 앞에선 장재근 진천선수촌장.   양회성 기자
진천선수촌 조형물 앞에선 장재근 진천선수촌장. 양회성 기자

선수촌장으로 일하면서 그는 일주일에 하루 서울에 있는 집에 갔다. “왜 출퇴근을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선수촌에 있는 게 너무 행복하다. 평생 운동을 해 온 나는 누가 뭐래도 ‘운동쟁이’다. 선수들, 지도자들과 같이 웃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라고 말했다. 2월 말로 2년간의 임기가 끝나는 그는 “내가 선수 생활을 할 때만 해도 주입식으로 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고 이제는 선수들 스스로가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갖고 운동해야 한다”며 “자신의 꿈을 위해 젊음을 투자하는 거다. 자신의 꿈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 언제든 집중력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장재근#진천선수촌장#인생홈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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