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 교수처럼 되라는 어머니 말씀, 나를 수필가로 만들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7월 24일 13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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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2편 연달아 펴낸 정은귀 교수

21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에서 웃고 있는 정은귀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정 교수는 “시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시는 재밌다. 또 시는 정말로 힘이 된다”고 말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난 네가 연구자이자 수필가였던 장영희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1952∼2009) 같은 분이 됐으면 좋겠단다.”

정은귀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54)의 어머니는 2000년 정 교수가 미국 뉴욕주립대(버팔로) 현대미국시 박사 과정을 위해 한국을 떠날 때 이렇게 말했다. 정 교수가 연구자뿐 아니라 대중에게 시를 소개하는 사람이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한 것이다. 23년이 지나 정 교수는 15일 ‘다시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들’(민음사), 20일 ‘나를 기쁘게 하는 색깔’(마음산책) 에세이를 2편 연달아 펴냈다. 지난해 4월 에세이 ‘딸기 따러 가자’(마음산책)를 펴낸지 1년 3개월 만이다.

21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에서 웃고 있는 정은귀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21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그는 시에 대한 순수한 믿음을 간직한 문학소녀였다. 그는 “23년 전 어머니의 말씀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다”며 “논문 쓰는 일만큼 시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글을 쓰는 일이 즐겁다”며 웃었다.

“83세 어머니는 아직도 시를 매일 필사하세요. 가끔 자신이 쓰신 시를 제게 보내오기도 하고요. 호호.”

그는 미국의 앤 섹스턴(1928~1974), 영국의 크리스티나 로세티(1830~1894) 등 해외 여성 시인의 시를 국내에 소개한 문학 번역가로 유명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자작시를 낭송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미국 시인 어맨다 고먼(25)의 시집 ‘우리가 오르는 언덕’(2021년·은행나무), ‘불러줘 우리를, 우리 지닌 것으로(2022년·은행나무)를 번역한 것도 그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많은 여성 시인의 작품을 읽으며 눈을 떴다”며 “한국 독자들이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영미 시인의 작품을 원한다는 걸 알아 번역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고 했다.

‘다시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들’ 표지. 민음사 제공.
‘다시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들’ 표지. 민음사 제공.
신간에서 그는 여성 시인의 작품을 쉽고 친절하게 소개한다. 202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80)의 문장 “나는 말을 해요,/산산이 부서졌으니까요’(시 ‘꽃양귀비’ 중)를 소개하며 “말을 건네는 것은 부서진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평화란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 내는 것”(나희덕 시 ‘평화의 걸음걸이’ 중)이란 시구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외치고 나누는 평화가 얼마나 어설픈 허투루 일이었는지 실감”한다고 고백한다.

“시를 읽는 건 ‘자각’하는 과정이에요. 반복되는 삶에서 우리가 바라보지 못한 것에 새롭게 눈을 뜨게 해주죠.”

‘나를 기쁘게 하는 색깔’ 표지. 마음산책 제공.
‘나를 기쁘게 하는 색깔’ 표지. 마음산책 제공.
그가 2021년 서울시 시민대학에서 시민 여러 명이 함께 쓴 시 ‘엄마 이야기’를 소개한 것도 눈길 간다. “엄마는 안전지대다/엄마는 선물이기도 아니기도 하다/엄마는 ‘하기 나름’이다/ 엄마는 핸폰이다”라는 시구에는 엄마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평범한 이들의 시각이 다양하게 담겼다. 그는 “시를 쓰고 나누는 과정에서 모두가 자기만의 엄마를 새롭게 만났다”며 “시를 만나는 일은 소중하지만 잊고 있던 존재들을 다시 품고 응시하는 일”이라고 했다.

인터뷰가 끝날 때 그는 어머니가 쓴 시 ‘첫사랑’을 보여줬다. “삶에 짜들고 힘겨웠을 때/어머니는 나에게서 떠나가셨다”(시 ‘첫사랑’ 중)는 시구는 정 교수의 어머니가 자신의 어머니를 첫사랑으로 묘사한다.

“한 편의 짧은 시에 인생이 들어있어요. 하나의 시어, 한마디 구절을 읽을 때마다 경이로운 이유죠. 제 어머니처럼 누구나 시를 읽고 쓸 수 있다는 걸 독자에게 알려주고 싶습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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