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2023/단편소설 당선작]녹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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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현진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녹은 내가 강의하던 학교들로 찾아와 시위 비슷한 걸 했다.


이상한 문장을 쓴 종이를 들고.》

곤란하게 됐어.

주임 교수의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그녀가 아직 하지도 않은 말을 떠올렸다. 전화를 끊을 때까지 머릿속에 배경음처럼 같은 말이 울렸다. 해촉 통보를 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의 잘못도 아니었다. 강의를 나가고 있던 다른 두 개의 대학에서 잘린 참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자리인 모교의 주임 교수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었고 용건은 뻔했다. 모두 같은 말을 했다.

노 선생 잘못이 아닌 건 알지만. 학교가 시끄러우니 어쩔 수가 없다. 곤란하게 됐다.

누가 곤란하게 됐다는 것일까. 주어가 없는 말들은 참 편리했다. 그런 말들은 미안하지 않으면서도 미안한 척할 수 있었다. 곤란하지 않은 사람이 곤란한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이면서도 정작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미안한 기분을 가져야 했다. 억울하지만 억울함을 토로할 대상이 없었다. 그게 나의 위치였다. 주임 교수가 보자는 말을 꺼내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전화로 하시지. 어차피 자를 거면서 굳이 학교까지 나오라고 하는 게 더 성가시게 느껴졌다. 주임 교수로서는 나에 대한 배려일 것이었다. 하지만 서로가 생각하는 배려가 달랐다.

그게 오늘이었다. 예상과 달리 주임 교수는 어색한 웃음으로 나를 맞지 않았다. 미안한 기색도 없었다. 평소와 같이 맑고 높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면서 자신이 만든 핸드 드립 스탠드를 자랑했다. 원목 받침대 가장자리에 황동으로 이루어진 기둥과 고리가 결합된 형태였다. 주말마다 남편과 목공방에 다닌다고 했다.

“무슨 나무게?”

아무 생각 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드립 스탠드를 매만지니 그녀가 물었다. 알 턱이 있나. 나무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진 적도 없었고, 가질 때도 아니었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었다. 태평하게 자신이 만든 목공예품을 자랑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이질감을 느꼈다. 교양 학부의 주임 교수인 장 교수는 실패라고는 겪어 본 적 없는 여자였다. 곧 교양대 학장이 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정수리 부분부터 머리가 하얗게 세기 시작했는데 그마저도 기품 있어 보였다. 그녀는 공공연하게 자신이 가진 것들과 이룬 것들을 한 번도 원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건 사실처럼 보였고, 그런 걸 말해도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그녀는 늘 이미 뭔가가 되어 있는 삶을 살았다. 그것도 결코 그녀의 잘못은 아니다.

“이게 흑단 나무라고 해.”

주둥이로 뜨거운 김을 뿜어내는 커피포트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장 교수는 말했다.

“흑단 나무요?”

“이게 검은색으로 칠한 게 아니야. 그런데도 아주 까맣고 윤이 나지? 이 나무 자체가 새까맣거든. 기둥을 베면 아주 단단하고 검은 조직들이 들어차 있어. 이게 아주 고급 수종이라고.”

흑단 원목은 탄력이 있고, 매우 치밀하고 단단한 조직으로 이루어진 나무이다. 아름다운 검은색의 나무. 부드러운 광택을 지닌 나무. 영원히 지속되는 나무. 흑단 원목에 대해 그녀가 들려주는 말들은 가본 적 없는 먼 나라에서 사람들이 빨래를 널고, 새파란 잔디에 물을 뿌리고,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일처럼 아득했다. 말을 듣고 보니 빛이 감도는 검은색이 아름답네요. 내가 말하자 장 교수는 흡족해하며 원목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말을 이었다. 이 세계에 얼마나 다양하고 신기한 나무들이 있는지 찬탄하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동안 전남편이 내게 자주 했던 농담이 스쳐 갔다.

공감해? 공감 못 해? 전남편은 수시로 내게 물었다. 교수가 되는 순간 공감 능력이 떨어지니 대비하라는 장난이었다. 사소한 것들이었다. 일상의 당연한 일들이나 ‘한국인이라면 공감하는 일’ 따위의 제목으로 인터넷에 떠도는 내용을 들려주며, 아직 공감하지? 덧붙였다.

이거 봤어? 한국인에게 마늘 조금은 한 움큼이라 외국인이 충격 받는 거.

사람은 없고 짐만 있을 때. 외국인은 물건을 탐내는데 한국인은 자리를 탐낸대. 그런데 우린 자전거는 그렇게 훔쳐 가. 웃기지. 그런데 공감해?

처음엔 나도 웃었다. 하지만 내 미래에 대한 상상이 씹어 뱉은 포도 껍질처럼 쪼그라들수록 농담은 재밌지 않았다. 내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자 그는 내가 변해간다고 또 놀렸다.

원목의 점성과 탄력성에 대해 이야기하던 장 교수는 원목의 색깔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고 이제 몸통을 가르면 분홍 속살을 드러내는 나무를 말하고 있었다.

이런 거구나. 웃기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장 교수는 분쇄된 원두에 정성스럽게 물을 부었다. 좋은 원두라고 했다. 좋은 냄새가 났다. 그녀가 멋쩍지 않은 태도로 나를 대한 건 이유가 있었다. 나는 잘리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다음 학기 강의 시간표를 말했다. 얼굴이나 보자던 말은 정말 말 그대로였다. 다행이면서도 씁쓸했다. 다른 의미를 담지 않는, 그래서 훼손되지 않는 말을 할 수 있는 것 역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자격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것이야말로 특권이었다. 현재에도 미래에도, 말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결코 부서지지 않는 말을 할 수 있는 특권.

“감사해요.”

“노 선생 잘못이 아니잖아. 정말 나는 그렇게 생각해.”

다들 그렇게 말은 했다. 하지만 다른 대학에선 더는 일할 수 없었다. 대학들 입장에서는 시끄러운 상황을 견디면서 시간 강사를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해.” 그녀가 말했다. “이럴 때 논문 쓰면 되지. 언제까지 시간 강사만 할 순 없잖아.”

장 교수는 자신의 말이 권위적이라고 느꼈는지 상냥한 말투로 말을 덧붙였다.

“노 선생도 빨리 자리 잡아야죠.”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커피 한잔을 다 마시자 자연스럽게 일어설 분위기가 됐다. “이제 노 선생도 바쁜데 가봐야지.” 나는 괜찮다고 웃으면서도 일어섰다.

“그런데 노 선생.”

문 앞에서 장 교수는 턱을 공중 쪽으로 치켜올렸다가 내렸다.

“노 선생이 어떻게 좀 해야지 않겠어?”

아무 곳이나 가리켜도 자기가 가리키는 곳이 곧 정확한 방향이 된다고 믿는 태도가 방향을 결정했다. 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노 선생이 뭘 어떻게 하겠냐마는.”

그녀가 가리킨 것은 학교 정문 앞에 서 있는 여자였다. 주임 교수는 고개를 딸깍 움직이는 것만으로 그 여자를 가리킬 수 있었고 나는 그 방향의 끝에 서 있는 여자가 누구인지 잘 알았다. 녹이었다.

“다음 학기까지는 내가 어떻게든 힘써 볼게. 논문 빨리 쓰고.”

문이 닫혔다. 그녀는 그래도 내게 좋은 사람이었다.

나도 묻고 싶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나에게, 그리고 나를 이 상황으로 몰고 간 녹에게.

녹은 내가 강의하던 학교들로 찾아와 시위 비슷한 걸 했다. 이상한 문장을 쓴 종이를 들고. 종이가 크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쓰는 8절 스케치북이었다. 원래 백색이었을 종이는 노란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작고 엉망인 글자가 위협적이지 않은 만큼이나 사실 그녀의 행동도 아주 위협적이진 않았다. 가만히 서 있을 때도 있었고, 스케치북을 바닥에 팽개쳐 놓고 뭔가를 하기도 했다. 편의점 김밥이나 샌드위치를 먹고, 책을 읽고, 핸드폰으로 유튜브 영상 같은 걸 봤다. 아무것도 없는 누런 종이가 펼쳐져 있거나 어린아이가 그렸을 빨강 초록 주황 로봇 그림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거센 바람에 펄럭거리다 멈춘 스케치북 표지에는 빨간 머리띠를 한 백설 공주와 큰 성이 그려져 있었다.

녹이 시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시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거 참 곤란하게 됐는데요. 아직 심각해진 상황은 아니었지만 학교는 앞으로 심각해질 상황을 우려했다. 그런 예상은 절반은 틀렸고, 절반은 맞았는데 먼저 학교 밖으로는 전혀 이 일이 알려지지 않았다. 언론에서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 커뮤니티에는 이 내용이 올라왔다. 녹의 이야기를 제보하는 익명의 학생이 있었다. 내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제보 글은 극히 적은 조회수를 찍었고, 관심을 갖는 학생들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위협적이지 않은 녹의 행동은 내 상황을 흔들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아주 미미한 물결에도 난파되고 가라앉을 수 있었다.

정문 쪽으로 내려오니 녹이 보였다. 녹은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노교수를 고발하는다
저가 아이를 잃었습니다
왜냐하면 노교수는 책임입니다

처음에는 황당하고 화가 났는데 우습게도 시간이 지나니 나는 녹의 저 문장들을 교정해주고 싶었다. 정확하지 않은 문장들을. 직업병이었다.

1. 첫 문장: 우선 나는 교수가 아니었다. 시간 강사였다. 그러니까 “노교수를 고발하는다”는 “노 강사를 고발한다”로 고칠 것.

2. 두 번째 문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나 역시 놀랐다. 그 사고가 녹의 아이의 일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잘못된 문장. 다음과 같이 적절한 조사로 수정할 것. “저가 아이를 잃었습니다→ 저는 아이를 잃었습니다”

3. 마지막 문장: 삭제할 것. “노 강사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또는 “노 강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녹, 너는 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왜? 그것이 도대체 왜 나의 잘못인가, 나는 되묻고 싶다. 녹을 붙잡고 흔들고 싶다. 하지만 나는 녹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교정 앞에 서 있는 녹의 머리 위로 나뭇가지와 잎들이 요란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나무가 부서지며 녹을 반으로 쪼갠다. 반을 가르면 단단하고 부드럽고 아주 까만 빛을 드러내는 원목처럼. 까맣고 붉고 부드러운 녹. 성난 바람은 모든 것을 휩쓸어 간다. 고요해질 때까지. 세상은 검고, 또 하얗다.

나는 지나쳐 길을 내려와 정류장으로 향했다.

녹은 내 아이의 베이비시터였다. 내 아이를 돌보겠다고 먼저 제안한 건 녹이었다. 녹을 처음 만난 건 다문화가족 지원센터 수업에서였다. 결혼 이주 여성을 대상으로 3개월간 운영되는 수업이었다.

하고 싶은 거 아무거나 하면 돼. 원래 하던 거 그냥 해. 문제없어.

내 사정을 아는 선배가 소개해 준 일이었다. 수입이 끊기는 방학은 가장 두려운 기간이었다. 전남편은 양육비를 보내기는 보냈는데 문제가 좀 있었다. 센터 수업을 하던 도중 핸드폰 액정 화면에 입금 문자가 떠오른 게 보였다. 나는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밖으로 달려 나갔다.

“뭐 하는 거야. 진짜.”

“왜. 뭐가.”

“번번이 왜 이러냐고 진짜.”

전남편은 자꾸 돈을 모자라게 보냈다. 많이도 아니었다. 5만 원, 3만 원, 8만 원, 어느 달에는 2만 원이 모자랐다. 그게 더 짜증이 났다. 전화를 하기도 싫었다. 받아야 할 몫인데 달라고 하는 것이 구차하게 느껴졌다. 2만 원을 덜 보낸 달에는 웃음이 터졌다. 곧 나를 놀리는 건가 싶어 분노가 치밀었다가 2만 원이 주는 치사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창피했다.

“사정이 있어서 그렇지.”

그의 사정은 궁금하지 않았다. 나의 사정으로도 벅찼다. 또 대체 5만 원이 부족할 사정이라는 게 무언가. 100만 원, 500만 원도 아니고. 담배만 피우지 않았어도, 커피를 덜 마셨어도, 뭘 어떻게 줄이든 보낼 수 있는 돈, 딱 그 정도였다. 그는 무신경했을 뿐이었다. 쓸 걸 다 쓰고 사정이라니. 나는 기가 차서 되묻지도 않았다. 내가 말이 없자 그가 먼저 말했다.

“다음에 한 번에 다 보낼게. 그러면 되잖아.”

“아니, 나도 달마다 계획이 있잖아. 제발 달마다 제대로 보내. 다 보내.”

통화를 마치자 온몸에 기운이 빠지고 손이 저렸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강의실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렸는데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게 그녀가 내 뒤에 바싹 붙어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랐는데 그녀가 대뜸 말했다.

“그거 저가 하면 안 돼요?”

“네? 뭘요?”

수업을 듣는 녹이었다. 전남편과 전화로 싸우는 걸 들은 모양이었다. 녹은 자기가 아이를 돌보겠다고 말했다. 내가 그런 대화를 했었던가. 아니었다. 베이비시터에 관한 얘기를 하진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이어나갈 겨를도 없이 녹은 내게 쏘아붙이듯 말을 쏟아냈다.

“저가 돈이 필요해요. 지금 일 없어. 저 아이 잘 봐요.”

“잠시만요. 녹.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저 돈 조금. 조금 줘도 돼요. 저가 더 잘해요.”

녹은 자기가 열 살짜리 아들의 엄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우리 일단 수업 들어가요.”

나는 녹의 말을 가로막고 함께 강의실로 들어갔다. 쉬는 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쉬는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나는 조금의 문제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수업 내내 녹은 나를 빤히 보았다. 원래도 녹은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하던 거 그냥 해. 선배의 말처럼 나는 정말 그렇게 했다. 나는 대학 교양 수업에서 ‘한국 사회의 다문화’ 강의를 해왔다. 한국에서 다문화 주체들이 어떻게 재현되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수업이었다. 나는 한국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 내용을 그대로 이주 여성들 앞에서 읊었다. 어색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외에 내가 떠들 수 있는 내용도 없었다. 금세 그 불편함이 사라졌다. 거의 수업을 듣지 않았다. 대부분 지원비를 받기 위해 센터 수업을 들었다. 출석을 하는 게 중요했다.

녹은 그곳에서 내 강의를 듣는 유일한 수강생이었다. 녹은 열렬한 눈빛으로 나를 쫓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어느 순간부터 녹을 보며 말했다. 나는 녹이 강의를 잘 알아듣는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알고 보니 착각이었다. 녹은 내 말을 거의 절반은 이해하지 못했다. 수업이 끝나면 녹은 내가 나눠준 프린트를 갖고 나왔다. 거기 적힌 단어들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뜻을 물었다. 체류, 비국민, 재현, 순응……. 초국가…. 나는 당연하게 쓰던 말들을 또 다른 단어로 대체해서 설명했다. 쉽게 말하면 나타난다는 뜻이에요. 녹은 내 말을 반복해서 따라 했다. 나타난다…. 나타나……. 그게 이해했다는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녹이 짚는 글자가 오타인 경우도 있었다. 어머, 미안해요. 이거 글자 잘못 썼네? 잘못 쓴지도 몰랐네. 배재가 아니라 배제예요. 나는 글자를 고쳐 써주며 오타를 알려주어 고맙다고 했다. 무슨 말이에요? 녹은 다시 내가 고쳐준 단어의 뜻을 물었다. 나는 그런 녹에게 마음이 갔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모두가 빠르게 강의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책상마다 그대로 남아 있는 프린트를 모았다. 정리를 마친 후에 밖으로 나갔는데 문 앞에 녹이 서 있었다.

“저가 돈 필요해요.”

어떻게 알았을까. 수업에서는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으면서. 베이비시터에게 아이를 맡긴 상태였고, 그 비용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벅찬 것은 사실이었다. 우연이었는지는 몰라도 내 문제를 녹은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그럼 녹 아이는 누가 보고요?”

“아들 열 살이에요. 혼자 있고. 아주 똑똑해요. 아주 똑똑해요.”

보통 결혼 이주 여성 시터의 비용은 한국인 시터 비용의 절반이었다. 녹은 딱 그 절반에 살짝 못 미치는 액수를 말했다. 나는 망설였다.

“왜 안 돼요?”

녹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녹의 말이 맞았다. 녹은 돈이 필요하고 나는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게다가 더 적은 돈으로 베이비시터를 구할 수 있다면 전남편이 5만 원씩 덜 부쳐오는 일에 그렇게나 구차해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녹. 그거보단 좀 더 줄게요.”

녹은 바로 그 다음 주부터 내 아이를 돌보기로 했다.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초록색 우산과 오렌지색 우산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이는 곧 일어났다. 바로 옆에 떨어진 초록색 우산을 주웠다.


우산 하나는 좀 멀리 날아가 있었다. 아이는 우산을 향해 걸어갔다.》

제목: 오늘의 녹.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메일이 한 통 날아왔다. 발신자의 이름은 따로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망설이다가 메일을 클릭했다. 내용에 글은 없이 사진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스케치북을 찍은 사진이었다.

저가 아이가 꿈는 로봇입니다
아이가 아주 똑똑하는다


나는 메일을 읽고 삭제했다. 이후로 메일이 매일같이 도착했다. 제목은 늘 같았다. 오늘의 녹. 매번 다른 문장이 적힌 스케치북 사진을 첨부하고 있었다.

-아이를 보고 십습니다

-아이가 좋은 것: 김, 폴라포 아이스크림, 몽키키드 워리어 로봇, 비

-저가 열씸히 살았습니다. 저가 대학교 나왔습니다.

-모두는 제게 사과하는다

오늘의 녹, 이란 제목의 메일이 오면 바로 삭제할 수도 있었다. 나는 다음에는 그렇게 해야지 다짐하면서도 번번이 메일을 클릭했다. 누가 보내는 것일까. 녹일까. 긴장해서 클릭했다가 별말이 적혀 있지 않은 것을 보며 안도했다. 평소 맞춤법이 잘못 쓰인 간판이나 메뉴판, 또는 화장실 문에 붙은 틀린 문장들을 보며 나는 민망함을 느끼곤 했다. 김치찌게, 셋트 메뉴 출시, 깨끗히 사용해주세요. 못마땅하기보다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오류에 왠지 몰라도 내가 수치심을 느꼈다. 녹의 문장들을 계속 읽어나가면서 그 비슷한 감정이 일었다. 점차 오늘의 녹은 수신자도 발신자도 중요하지 않은 스팸 메일처럼 보였다.

-노교수는 왜 내 아이를 오지 못하게 했습니까?

그러다 나는 흠칫 놀랐다. 정확한 문장. 하지만 거짓이었다. 계속 날아오는 메일에 대해 나는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누가 보내는지도 알 수 없었고, 섣불리 대응하는 것이 더 화를 키울 수 있었다. 처음으로 답신을 클릭했다.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어 정정합니다. 나는 제목을 적었다.

녹의 시터로서의 실력은 괜찮다고 할 수 없었다. 괜찮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녹은 오후 네 시에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왔다. 오후 네 시부터 저녁 여덟 시까지 내 아이를 돌보았다. 나는 집에 있는 날도 있었지만 그래도 녹에게 아이를 부탁했다. 하루 네 시간. 그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공부를 하고 논문을 써야 했다. 목요일에는 지방에서 강의가 있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집을 비워야 했다. 그날은 녹이 종일 아이와 있어 주었다. 아이는 녹을 좋아했다. 녹이 있는 동안 내가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것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녹이 가야 할 시간이 되어 거실로 나가면 식탁에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녹은 요리를 아주 잘했다. 나는 아이만 봐주면 된다고 말했지만 녹은 계속 요리를 했다. 어느새 나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감도는 집에 익숙해졌다. 녹은 청소도 잘했다. 정말 이런 것까지 안 해도 돼. 녹을 말리면서도 나는 물때 하나 없이 깨끗한 세면대와 화장실 타일, 싱크대를 보며 감탄했다.

“너 왜 안 똑똑해.”

거실에 나왔을 때 정확히 그렇게 녹이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안 보는 사이에 아이를 학대한 건가. 상황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기저귀를 펼치고 누운 아이는 녹이 무슨 말을 하든 까르르 웃었고, 그런 아이를 녹은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며 같이 웃었다. 그래도 짚고 넘어가야 했다.

“녹. 아이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면 안 되지. 안 좋은 말 말이야.”

녹은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대답했다.

“진짜 안 똑똑해. 태오. 얘 네 살인데 왜 아직 기저귀 해요. 이거 안 돼.”

“녹. 안 되는 거 아니야.”

아이마다 다를 수 있는 거란 내 말을 녹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내 아들은 안 그랬어요. 일찍 기저귀 안 했어. 이거 아니야.”

나는 전문가들의 말을 들려주려 했지만 녹은 끝까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녹은 여러 번 나를 놀라게 했다. 좋은 의미로든 좋지 않은 의미로든.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와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 녹이 오지 않았다. 녹에게 전화를 거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녹과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을 열고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가 둘이었다. 녹의 양손에 붙들린 아이가. 아이들은 폴라포 포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이 아이는 누구야?” 묻기도 전에 나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 알았지만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었다.

“내 아이요. 인사해. 바잇.”

사정을 먼저 말했더라면 나는 이해했을 것이다. 아이가 집에 혼자 있는 게 딱하다고 말했어도 아이를 데려오라 했을 거다. 문제는 녹이 내게 아무 말도 없이, 허락도 없이 자신의 아이를 데려왔다는 것이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인사하는 아이에게 미소를 지었다. 녹이 아이와 돌아갈 때까지 나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녹이 갈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녹과 녹의 아이에게 인사했다. 그런데 녹이 말했다.

“기분 안 좋아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아이를 보며 조심히 가라고 말했다. 노교수는 왜 내 아이를 오지 못하게 했습니까? 사실과 다르다. 이후로도 녹은 마음대로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집에 왔다.

녹은 자기 아이가 똑똑하다는 자랑을 많이 했다. 나는 녹의 아이를 보면서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열 살인데도 정확한 문장과 풍부한 어휘를 사용하며 바잇은 내게 말을 걸었다. 지나치게 어려운 단어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책을 많이 읽나 보네. 내가 말하자 바잇은 자신의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책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나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바잇이 벌떡 일어나 냉장고 쪽으로 달려갔다. 컵에 물을 따르고, 거실장에서 약통을 꺼냈다. 두통약 한 알과 물을 챙겨 가져왔다. 당혹스러웠다. 나는 바잇이 건네준 두통약과 물을 받아 말없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계속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녹은 내 아이에게 다정하다가도 이 바보야, 라고 수시로 말했다. 바잇은 내 아이를 귀찮아했다. 가만히 지켜보니 내 아이는 녹과 바잇의 애정을 갈구하며 꽁무니를 쫓아다녔다. 바잇은 쫓아다니는 태오를 귀찮아하면서도 내게 칭찬받고 싶어 안달 난 아이처럼 굴었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자 내 아이는 도형을 맞추는 블록을 갖고 놀기 시작했다. 세모, 동그라미, 하트 모양으로 구멍이 뚫린 나무 상자에 도형 블록을 끼워 넣는 놀이였다. 저게 저 나이에 맞는 놀이인가. 태오가 블록 하나를 전혀 맞지 않는 구멍에 대고 낑낑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아이가 똑똑하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부엌 솥에서 카레가 끓고 있었다.

“녹. 지금 뭐 해?”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벌컥 나왔다. 부엌에 서 있던 녹은 까맣고 빛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태오가 혼자 있잖아.”

나는 제발 아이를 잘 봐달라고 말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도 녹은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할 때가 있었다. 병원으로 달려가니 태오의 한쪽 눈에 붕대가 붙어 있었다. 식탁 모서리에 부딪쳐 눈가가 찢어졌고 여섯 바늘을 꿰맸다고 했다. 자칫하면 실명할 수도 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병원 밖을 나섰다. 녹과 녹의 아이가 뒤따라 나왔다. 나는 아이를 데려오는 건 괜찮지만 그렇다고 일을 제대로 못 하면 곤란하지 않냐고 녹에게 말했다. 내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녹의 아이가 녹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나는 목소리를 낮출 수 없었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녹. 녹은 내 애를 봐주기로 했잖아. 얘기가 다르잖아! 그 뒤로 녹은 일을 할 때 자기 아이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녹이 내 아이를 다치게 했어도 녹을 자르지 않았다.

제목: 거짓말 Re: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어 정정합니다.

클릭했다.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더 이상 오늘의 녹, 메일이 오지 않았다. 스팸 메일함을 보니 거기에도 없었다. 안심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동시에 드는 순간 주임 교수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녀는 한 문화 재단에서 수상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답장하자마자 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주임 교수였다. 그녀는 시상식이 너무 형식을 따진다면서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무슨 축사까지 한다더라고. 사람 민망하게. 그녀는 이럴 거면 안 받는 게 낫겠다며 불만을 쏟아냈다. 나보고 축사할 사람을 추천하라던데. 아니 그리고 할 거면 그런 건 알아서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주임 교수는 원래 그런 건 권위 있는 사람들에게서 받는 것이 관례라는, 나도 다 아는 내용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런데 그런 거 너무 권위적이고 뭐랄까. 뻔하잖아. 그래서 말인데 자기가 써주는 거 어때?”

그녀는 시상식 날짜와 장소를 말하며, 내가 알아두면 좋을 사람들이 많이 올 거라고 했다.

“어때? 자기도 좋지?”

내게 좋은 건가. 주임 교수의 말이 무슨 말인 줄은 알았다. 그녀는 정말 내게 좋을 거라고 확신할 것이다. 주임 교수와 나의 차이는 그 확신이 있느냐였다. 나는 싫다기보다 좋은 건지 좋지 않은 건지 확신하지 못했다. 고마운 것인지 잘 알지 못하면서도, 또 그러므로 주임 교수의 확신에 따라 나는 고맙다고 말했다.

“노 선생. 그리고 좋은 소식 하나 더.”

“네?”

“아니, 그 여자 말이야. 요즘 없던데?”

학기가 시작되고서 나는 후문 쪽으로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녹이 학교 정문 앞에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기가 뭐 어떻게 한 거야?”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답했다. 주임 교수는 아무튼 잘된 일이라고 했다. 그녀는 전화를 끊기 전에 인사 대신 이렇게 말했다.

“좀 잘 입고 와.”

시상식에 잘 입고 오라는 말이었다. 전화를 끊고 보니 마땅한 옷이 없었다. 나는 백화점에 가서 제법 값이 나가는 옷을 골랐다. 머리로 계산을 해보니 딱 맞았다. 전남편이 오늘 보내주기로 한 양육비까지 계산하면.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그동안 보내주지 못한 것까지 합쳐서. 백화점 거울 앞에 서서 상태를 확인했다. 이 정도면 잘 입은 건가. 주임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가 뭐 어떻게 한 거야? 나는 거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의 녹’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낸 답장이 떠올랐다. 나는 사실만을 적었다. 옷을 사서 나왔다. 쇼핑백을 들고 길을 걸으며 계속 생각했다. 녹은 왜 억울해할까. 억울한 건 나였다. 아이를 데려오는 건 괜찮지만. 나는 내 말을 기억했다. 사고의 자리에 내가 있던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나는 녹에게 경고까지 했다.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나는 쇼핑백을 감싸 안고 보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쏟아지는 비를 지켜보고 있기가 괴로웠다.

돌아갈 시간이 된 녹에게 우산을 하나 내미는 내가 떠올랐다. 일기 예보에 비 소식이 있었고, 저녁이 되니 비가 쏟아졌다. 녹은 고개를 저었다.

“아이 왔어요. 밑에. 우산 갖고.”

“아이가 혼자 여길 왔다고?”

나는 놀라서 물었는데 녹은 내 말의 의미를 잘못 알아들었다.

“네. 아주 똑똑해요.”

녹은 아이가 원래 엄마를 잘 데리러 온다고 덧붙였다. 길도 잘 찾고 버스도 잘 탄다고 했다. 조심해야 하지 않아? 나는 말했다. 그래도 위험한데. 하지만 녹은 아이가 똑똑하다는 걸 자랑하느라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나는 더는 녹의 자랑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긴 장마가 시작되는 참이었다. 다음 날도 비가 왔다. 녹은 그날도 내가 건네는 우산을 받지 않았다. 녹이 일부러 우산을 챙겨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밖으로 나갔던 녹이 잠시 후 다시 올라왔다.

“아이, 아이 여기 왔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고 녹은 당황하며 전화를 걸었다. 아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온다고 했던 아이가 오지 않았다.

“아직 도착 안 한 걸 수도 있지. 집에 있는 거 아냐?”

녹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비가 무섭게 쏟아졌다. 아이는 혼자 집에 있었다. 아이는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엄마의 퇴근 시간보다 먼저 아파트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혼자 어두운 골목길을 내려왔고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 앞에 섰다. 횡단보도를 건넜고 길을 계속 걸었다. 자전거가 속력을 줄이지 않은 채 아이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왔고 아이는 피하려다가 바닥에 넘어졌다. 초록색 우산과 오렌지색 우산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이는 곧 일어났다. 바로 옆에 떨어진 초록색 우산을 주웠다. 우산 하나는 좀 멀리 날아가 있었다. 아이는 우산을 향해 걸어갔다.

여기까지가 CCTV에 담겨 있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배송 차량에 가려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두웠다. 몰려든 사람들이 서 있는 모습 외에는 온통 검었다.

사고 장면을 반복해서 보는 것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 뒤로 나는 그 사고에 대한 뉴스를 찾아보지 않았다.

입금 문자가 왔다. 그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무리 걸어도 응답하지 않다가 내가 직장으로 찾아가겠다고 문자를 남기자 전화를 걸어왔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전남편은 그간 보내지 못했던 몫까지 보내긴커녕 이번에도 5만 원을 비워서 돈을 보냈다. 내가 쏘아붙이자 그가 도리어 화를 냈다.

“너도 정말 너무한 거 아냐? 무슨 사정이 있겠구나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예 안 보내주는 사람도 많은데. 그 정도는 좀 알아서 봐줘야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 정말 왜 이래. 내가 낮게 읊조리자 그가 말했다.

“다음 달에 다 보낼게.”

그러고는 전화를 먼저 뚝 끊었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울고 싶었다. 그때 문자가 하나 왔다. 참 내가 말 못 했었는데. 축사 거마비도 챙겨준대. 많지는 않아도 참고해둬. 나는 일어났다.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었다. 비가 그쳤다. 밤이 된 것처럼 날이 어두웠다.

아이가 카레가 먹고 싶다고 했다. 아이와 마트에 가서 장을 보았다. 아이가 폴라포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떼를 썼다. 나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대신 아이가 좋아하는 스티커를 고르게 했다. 붙였다 떼는 스티커를 들고 마트를 나오면서 아이는 좋아했다. 그게 뭐라고. 작고 반짝이는 스티커에 정신이 팔린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이가 말했다. 이건 형아.

정체불명의 메일은 더 이상 오지 않았고, 녹의 스케치북도 사라졌다. 그런데도 말들이 멋대로 쏟아졌다. 비처럼. 내가 선 자리에서 물결쳤다. 태오는 으깬 감자를 좋아한다. 바잇은 좋아하지 않는다. 태오는 카레를 좋아한다. 바잇은 좋아하지 않는다. 녹이 삶은 감자를 부수고, 큰 솥에 카레를 끓인다. 카레가 조용히 끓는 동안 바잇은 태오를 미워한다. 나는 아이 어깨를 낚아채서 흔들었다. 네가 형이 어딨어?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 안에서 내 목소리가 울리며 나를 흔들었다. 어린이집에 가다가, 아이와 마트에서 나오다가, 버스를 기다리다가 나는 맞은편에 서 있는 녹을 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면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헛것은 아니었다. 내가 달래주지 않자 아이가 더 크게 울었다. 내년 봄에 놀러가요. 다같이. 녹의 아이가 내게 몸을 기울인다. 그래. 그러자. 대신. 나는 바잇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녹이 솥을 닦고, 쌀을 씻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내 아이를 끌어안았다.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깊은 어둠이 겹겹이 쌓인 너머로 검은 나무가 자라났다. 녹과 함께 솟구쳤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나는 최선을 다했어. 나는 녹을 보며 사정했다.

○ 당선소감
누군가를 현실에서 지우는 소설은 쓰지 않겠다


공현진 씨
공현진 씨
예년 같으면 소리를 지르며 눈밭을 굴러다녔을 것이다. 아무 번호로 전화만 와도 심장이 쿵쿵 뛰었을 거다. 당선을 많이 상상했다. 상상 속에서 나는 신이 났고, 울었고, 주저앉았다. 오랫동안 되지 않았다. 아무도 읽지 않아도 내가 내 소설을 읽을 거라는 주문으로 썼다. 내가 나의 소설의 독자이며 팬이라는 주문은, 쓸쓸하지만 그래도 계속 쓰는 힘이 됐다. 당선 소식을 받은 날, 기쁘지만 마음이 하염없이 날아가진 않았다. 너무 여러 날 상상과 제자리를 오가느라 담담한 태도가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시를 읽고 쓰고 공부하게 하신 이경수 선생님, 손을 붙잡아 주셨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깊이 감사드린다. 아낌없이 격려해 주신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님들께, 좀 더 용기를 내게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하다. 친구들에게도 인사를 전한다. 공국원, 김춘란. 당신의 자녀여서 감사하다. 나를 믿는 가족에게, 내가 믿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좋은 소설이란 무얼까 생각했다. 따듯한 소설을 쓰겠단 말도, 재밌고 놀랍고 섬뜩한 소설을 쓰겠단 말도, 아직 쉽사리 하기 어렵다. 그 모든 것에 계속 실패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두렵다. 남겨진 사람들, 남겨진 아이들에 대해 자주 마음을 기울였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소설을 쓰겠다는 건 오만이라는 것을 알았다. 상처 주지 않는다고 믿으면서 나는 상처를 줄지 모른다. 그래도 누군가를 현실에서 지우는 소설을 쓰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좋은 소설이 무언지 아직 모른다. 쓰고 싶은 것들을 쓰는 것. 계속 쓰는 것. 그 힘을 믿고, 쓰겠다.

△1987년 서울 출생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학사, 석사, 박사 졸업




○ 심사평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수작


오정희 씨(왼쪽)와 성석제 씨.
오정희 씨(왼쪽)와 성석제 씨.
다채로운 소재와 신선한 방식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본심 진출작 13편을 통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란 겨울이 지나가고 새봄이 다가오고 있다는 기미를 읽을 수 있었다.

‘드라큘라와의 조우’는 일단 재미있게, 술술 잘 읽힌다. ‘올드’한 드라큘라와 ‘직업적 혈액공여자’라는 관계 설정 역시 심상치 않다. 지금 당장 온몸으로 오늘의 힘겨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 군상과 소설 속 혈액공여자가 유비되고 있다는 점도 참신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소간 거친 문장과 급작스러운 마무리가 아쉬웠다.

‘메블라나’에는 ‘이슬람 신비주의 교단의 춤’ 혹은 경찰과 범인의 추격전에서 느끼리라 예상치 못한 뭉클함이 있다. 그것은 시장에서 떡볶이를 팔던 엄마의 신산한 삶이 주는 공감에서 우러나온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정제되지 않은 곳이 없지 않고,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길 만한 참신한 묘사나 표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선작인 ‘녹’은 쉽게 보기 힘든 문제작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곳’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 가운데 하나인 다문화가정과 사회적 약자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문학이 좁은 과녁을 적중시키는 정확한 문장과 적절한 단어 선택, 치밀한 서술에 의지하는 장르임을 환기시킬 만큼 세부가 잘 벼려져 있다. 아이를 잃은 엄마, 아이를 맡겼던 엄마가 각기 다른 층위에서 받는 고통을 통해 이 시대의 환부를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 모순과 아픔을 극복할 방법을 함께 성찰케 하려 한다는 점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오정희·성석제 소설가
#동아일보#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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