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천장 겪었던 그날, 첫 장 쓰기 시작…여성과학자들 공감 얻어”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6월 15일 10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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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인 케미스트리’ 저자 인터뷰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코다’와, 제작비 1000억 원을 들인 드라마 ‘파친코’로 2연타를 친 애플TV플러스의 기대작 중 하나는 곧 촬영에 들어가는 드라마 ‘레슨 인 케미스트리’(다산책방)다. 여성 과학자가 전무하던 1960년대 화학자인 엘리자베스 조트가 편견을 이기고 요리 프로그램 진행자로 성공을 거두는 과정이 그려진다. 당시 주부의 식사 준비는 허드렛일 취급을 받았지만 요리를 진지한 화학실험으로 대하는 조트의 모습에 전국 여성들이 열광한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이자 ‘캡틴 마블’ 역으로 유명한 배우 브리 라슨이 원작 소설을 보고 주연을 자처했다. 소설은 202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원고가 공개된 직후 22개국에 판권이 수출됐다. 국내에선 9일 출간됐다.

레슨 인 케미스트리는 놀랍게도 저자 보니 가머스(65)의 데뷔작이다. 평생 카피라이터로 일하다 뒤늦게 유년시절 꿈인 소설가가 된 그를 지난달 17일 화상으로 만났다. 가머스는 “책의 첫 장을 썼던 5년 전 그날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입을 열었다. 당시 과학·기술 분야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그는 남성이 대부분이었던 조직에서 성차별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회사에서 발표를 했는데 아무도 반응이 없다가 똑같은 아이디어를 남자 상사가 발표하니 다들 좋다고 하더군요. 당시 미팅룸엔 저 혼자 여자였어요. 그런 식으로 제가 한 일이 다른 남성의 공으로 돌아간 적이 많았어요. 그날 너무 화가 난 상태로 집에 와 책상에 앉았는데 엘리자베스 조트가 저에게 말을 걸더군요. 바로 노트북을 열고 첫 장을 쓰기 시작했어요.”

조트는 명석한 화학자의 자질을 갖췄지만 그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됐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박사과정에서 담당 교수는 조트의 실력보다 그의 아름다운 외모에 더 관심이 컸고, 자신의 일방적 구애를 거절한 조트에게 누명을 씌워 박사과정에서 조트를 쫓아낸다. 조트는 어렵사리 헤이스팅스 연구소에 들어가지만 남성 과학자들은 그의 성과를 가로채고, 여성 직원들은 “얼굴로 여기까지 왔다”며 그의 실력을 폄하한다.

“책이 발간된 뒤 수백 명의 여성 과학자들로부터 메시지를 받았어요. 그들은 책에 묘사된 1960년대 실험실 풍경과 지금 그들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더군요. 승진이 어렵고, 논문의 아이디어를 도난당하는 상황이 많다고요. 과학계의 유리천장은 여전히 존재해요.”

5년 간 책을 쓰면서 1960년대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하는데 참고한 자료는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불리는 1963년작 ‘여성성의 신화’(갈라파고스). 여성들이 사회로부터 아이를 기르고 남편을 내조하는 가정주부로서의 역할만 강요받는 당대 시대상을 비판한 책이다. “저의 어머니 세대의 시절을 생생하게 묘사한 책이었어요. 당시 여자는 수표에 서명을 하려면 남편의 공동서명이 필요했고,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을 소유할 수도 없었죠. 여자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사서, 간호사, 교사 뿐이었어요. 1960년대에 비해 상황은 나아졌지만 충분치 않아요. 유년시절 학교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에 기대되는 역할이 달랐고, 지금도 직장에서 남성과 같은 일을 해도 보수를 덜 받거나, 공을 빼앗기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되죠.”

책이 성공을 거둔 만큼 그가 드라마에 거는 기대도 크다. 드라마 제작을 위해 꾸려진 팀 구성원의 면면도 화려하다. ‘에린 브로코비치’ 각본가로 유명한 수재나 그랜트가 드라마 각본을 맡는다. 주연 조트 역을 맡은 라슨은 총괄 프로듀서로도 참여한다. 그는 “라슨의 소속사에서 책을 읽어볼 독점적 권한(exclusive read)을 달라고 먼저 요청했고, 원고를 읽은 라슨이 ‘엘리자베스 조트를 스크린에 그대로 살려내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며 “라슨은 페미니스트이자 훌륭한 배우이기 때문에 조트를 훌륭하게 연기해낼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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