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장년이나 청년이나 정파 불문 한목소리로 “단결! 단결!”

이진기자 입력 2021-07-23 11:34수정 2021-07-2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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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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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임시정부 이야기입니다. 1923~24년 임시정부는 ‘개점휴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구심점이 없었거든요. 기호파와 서북파가 갈등하고 임시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가 맞서며 생긴 균열이 계속 벌어지기만 했습니다. 이승만은 1921년 워싱턴군축회의에서 외교활동을 하다 하와이로 가버렸습니다. 임시정부 최고지도자가 자리를 비웠다는 뜻이죠. 1923년 임시정부를 개혁한다며 열렸던 국민대표회의는 5개월 간 토론 끝에 결렬됐습니다. 임시정부를 ‘고쳐 쓰자’는 개조파와 ‘새로 짓자’는 창조파는 서로 돌아섰죠. 임시정부는 ‘임시대통령 직무대행’이나 ‘임시대통령 대리’가 이끄는 비정상 국면이 이어졌습니다. 3·1운동의 민족적 열망을 현실화해야 할 임시정부의 딱한 모습이었죠.

왼쪽 사진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일어난 뒤 중국 자싱으로 피신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왼쪽부터 김구 추푸청 이동녕 엄항섭. 중국인 추푸청은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오른쪽 기사는 동아일보 1925년 2월 7일자 1면에 실린 이동녕의 인터뷰. 사진 출처는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이렇게 임시정부가 어려울 때 기둥 역할을 한 ‘어른’이 석오(石吾) 이동녕이었습니다. 1924년 그는 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됐고 군무총장에 이어 임시대통령 대리까지 1인 3역을 해냈죠. 파벌 다툼이 일어날 때마다 중심을 잡아주었습니다. 하지만 이해 말 재정난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결국 국무총리 직에서 물러나야 했죠. 1910년 망명한 뒤 풍찬노숙하며 독립을 위해 있는 힘껏 달려왔으나 이 일로 병까지 얻고 말았습니다. 1925년 2월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요양하던 그는 동아일보 특파원이 찾아오자 “남들이 나를 모르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각각 자기의 ‘나’를 모르기를 희망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제각기 ‘나’를 주장하면서 제일 중요한 단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안타까움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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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은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 시절의 김규식(오른쪽)과 집정관 총재 이승만. 오른쪽 기사는 상하이 푸단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던 김규식의 인터뷰. ‘반성과 단결의 필요‘ 제목으로 동아일보 1925년 2월 8~10일자에 3회 실렸다. 사진 출처는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그때 상하이 푸단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던 우사(尤史) 김규식도 “유대인 같은 확고한 단결이 있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아직 이것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동아일보 특파원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세 분이 진지한 성의와 위대한 인격으로 모범이 됐지만 개인 본위로 하는 바람에 임시정부의 마비가 왔다고 진단했죠. 이들이 희생적으로 행동했더라면 군중도 더 존경하고 동시에 단결하고 그러면 모든 일이 풀렸을 것이라고 아쉬워했습니다. 김규식은 스스로 창조파에 속했지만 당분간 정치에는 발을 끊고 교육과 실업에 힘쓰겠다고 했죠. 그만큼 분열된 임시정부에 실망이 컸나 봅니다. 그러면서도 단결만 하면 신봉하는 주의(主義)나 출신 지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재삼 강조했죠.

왼쪽 사진은 조선총독부의 일제감시대상 기록카드에 있는 초기 의열단 속의 김원봉(오른쪽). ②와 ③은 동아일보 1925년 2월 20, 21일자에 실린 김원봉 인터뷰. 하편인 ③은 일제에 의해 삭제당했다. ①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 등을 지냈던 이규홍의 동아일보 1925년 2월 11일자 인터. 사진 출처는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동아일보 특파원은 의열단 단장 김원봉도 찾아갔습니다. 당시 김원봉은 자금난에 빠져 의열단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죠. 그는 ‘내 말이 신문에 그대로 실리겠느냐’면서도 “민족운동이 곧 사회운동이 되어야 하고 사회운동자는 곧 민족운동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선민중의 생존번영과 자유평등을 위해 분투노력한다는 점에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이 뭐가 다르냐는 뜻이었죠. 김원봉은 민족이 계급보다 앞선다고 했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연대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즉 일본 무산자보다는 조선 무산자가 더 소중하다고 보았죠. 이 말을 놓고 보면 김원봉은 늘 민족을 중심에 둔 민족주의자였던 셈입니다.

동아일보 상하이 촉탁특파원에서 상주특파원으로 올라선 조덕진이 1925년 6월 12~15일자에 실었던 ‘상하이 5·30사건’ 시위 르포. 조덕진은 일본인으로 오해받을 위험을 감수하고 이틀간 시위현장을 누비며 생생한 소식을 전했다. 상하이 조계경찰의 진압을 3·1운동 때 당한 일제의 탄압에 비유하기도 했다.


임시정부가 휘청거리던 때 상하이에서 56세 이동녕, 44세 김규식, 25세 김원봉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단결’과 ‘단합’의 중요성을 이끌어낸 동아일보 특파원은 조덕진이었습니다. 필명을 ‘춘정(春艇)’이라고 했죠. 처음에는 촉탁, 즉 계약직으로 현지 채용됐다가 상주특파원으로 올라섰죠. 조덕진은 의열단 소속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김원봉이 “형과 나의 친한 사이의 사담으로야 말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라고 말문을 열었죠. 조덕진은 이해 5월 상하이에서 일어난 중국인들의 반제국주의 운동인 ‘5·30사건’도 4회 르포로 생생하게 소개했습니다. 본인은 그맘때 결성된 상하이청년동맹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도 했고요. 운동의 참여자이자 관찰자로 동시 활약한 인물이었습니다.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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