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사기 ‘표’와 ‘서’ 출간

동아경제 입력 2021-05-04 15:44수정 2021-05-04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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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소장 이덕일) 사기연구실(이하 사기연구실)에서 <사기> ‘표(表)·서(書(전 7권)’를 번역하고 신주까지 달아 출간했다. 작년에 ‘본기(전 9권)’를 출간한 데 이어 역시 롯데장학재단(이사장 허성관)의 지원을 받아 연구하고 출간했다.

지금까지 모든 사기 연구가들이 <사기>에 대해 감탄하면서 연구해왔다면 사기연구실의 학자들은 사마천의 머릿속을 분석해왔다. 그 결과 사마천이 동이족의 역사를 한족(漢族)의 역사로 바꾸기 위해 동이족인 삼황(三皇)을 지우고, 오제(五帝)부터 시작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동이족인 소호(少昊)를 지웠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사마천이 황제의 사적인 본기(本紀)를 중심으로 제후들의 사적인 세가(世家)와 신하들의 사적인 열전(列傳)이 떠받치는 기전체(紀傳體)를 만든 것은 독창적 발상이었다. 그러나 기전체 사서에는 싣지 못한 사건과 인물이 너무 많아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표·서’를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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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는 모두 10개인데, 사건을 위주로 분류한 사건 연표와 인물을 위주로 분류한 인물 연표로 나눌 수 있다. 사마천은 “시대를 함께해도 세대가 다르므로 연차가 분명하지 않아서 ‘십표(十表)’를 지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오제부터 한 무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나라에서 있었던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의 즉위, 폐위, 전쟁, 사망들에 관한 연대를 표로 작성했다. 이런 표를 작성할 때 사마천이 가장 고심했던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 하는 것이었다. 사마천은 그나마 사료가 남아 있는 주(周)와 노(魯)나라 연대기를 기준으로 방대한 ‘표’를 작성했다.

‘표’를 번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마천은 수수께끼 같은 숫자만 나열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연표인 ‘육국연표(六國年表)’의 서기전 469년의 경우 사마천은 ‘주(周) 八, 진(秦) 八, 조(趙) 四十九, 초(楚) 二十, 연(燕) 二十四, 제(齊) 十二’라고만 적었다. 다른 모든 연표도 마찬가지로 부가설명이 없다. 이 숫자들은 ‘주 원왕 8년, 진 여공공 8년, 조 간자 49년, 초 혜왕 20년, 연 헌공 24년, 제 평공 12년’이라는 뜻이다. 그간 출간된 대부분의 연표는 사마천이 쓴 숫자를 그대로 옮겨놓거나 잘못 놓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표’는 최초로 이런 모든 숫자의 의미를 풀어 서술하고 때로는 신주까지 달았다.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표’가 탄생한 것이다.

또한 사마천이 감춘 우리 역사의 비밀을 다수 밝혀놓았다. ‘삼대세표’에서는 고대 대부분의 군주가 동이족임을 밝혔다. 또한 ‘진초지제월표’에서는 고대의 요동이 지금 요동(요녕성 요하 동쪽)과 다르다는 사실을 밝혔다.

서초패왕 항우에 의해 요동왕이 된 한광이 봉해진 요동국의 수도 무종(無終)은 현재의 당산시 옥전(玉田)이였다. 현재 요동에 있었던 것으로 해석해 온 고조선·고구려·발해 등의 위치를 재검토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사기연구실과 국토지리실이 함께 작성한 아홉 장의 지도는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지도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지금의 하북성 갈석산 부근에 있었음을 보여주어 현재 중국에서 만리장성을 평양까지 그리는 역사 왜곡을 바로잡는 나침반 역할도 할 수 있다.



<사기> ‘서’는 ‘팔서’라고도 불린다. ‘예서(禮書)’부터 ‘평준서(平準書)’까지 나라가 돌아가는데 꼭 필요한 전문분야 여덟 개를 서술했다. 사마천은 ‘태사공 자서’에서 “예(禮)와 악(樂)을 덜어내고 보태었으며 율력(律曆)을 바꾸고 병권(兵權), 산천(山川), 귀신(鬼神), 천인(天人)의 관계에서 피폐한 국가를 떠맡고 변화를 통하게 해서 ‘팔서(八書)’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다.

각 방면의 전문서인 ‘서’는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사마천의 전문적 시각과 경륜이 담겨있다. ‘표’는 사마천이 베낀 대본이 있었다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 사마천의 독창적 시각이 담긴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팔서’ 중의 마지막 ‘봉선서’, ‘하거서’, ‘평준서’에는 사마천의 독창적 시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부친 사마담이 무제의 태산 봉선에 수행하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삼았기 때문에 ‘봉선서’를 크게 신경 써 작성했다.

황하를 다스린 기록인 ‘하거서’에서 사마천은 비로소 자신을 궁형에 처했던 무제를 긍정했다. 황하의 호자(瓠子)가 터져서 큰 홍수가 나자 사마천은 무제와 함께 치수사업에 동참했는데, 사마천은 “나는 천자를 따라 나무 섶을 지고 막았는데, 천자께서 호자에서 지은 시가 비통해서 이에 ‘하거서’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사마천은 경제정책에 관한 보고서인 ‘평준서’에서 “강성한 국가는 작은 여러 나라를 겸병해 제후를 신하로 삼고 허약한 국가는 조상의 제사가 끊기거나 세상에서 없어졌다”고 말해서 경제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갈파했다. 고대에 경제를 근본으로 삼은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래서 <사기>가 명분으로 가득 찬 죽은 역사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읽히는 산 역사서가 된 것이다.

‘표·서’의 번역은 <본기>처럼 직역을 원칙으로 삼았다. 본문은 물론 ‘사기집해·색은·정의’의 3가주석을 한 자도 빼지 않고 번역했고, 청나라 양옥승(梁玉繩)의 ‘사기지의’와 ‘고본죽서기년’, ‘춘추좌전’, ‘한서’ 등과 비교해 번역했다. 편마다 해제를 달아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고, ‘역서(曆書)’, ‘천관서(天官書)’, ‘평준서(平準書)’는 이 분야 전문가들의 감수를 받아 완성도를 높였다.

신효정 동아닷컴 기자 hj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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