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대를 졸업하고 고향인 전북 무주군의 보건진료소로 내려가 30년 넘게 근무하는 이가 있다. 박도순 보건진료소장이다. 그가 산골에서 주민들과 어울려 지낸 이야기와 함께 일상을 직접 촬영한 사진을 엮은 책 ‘거기 사람 있어요’(윤진·1만8000원)를 출간했다.
농사일을 하다 어깨를 크게 다친 할머니에게 도시에 사는 아들은 “한 번만 더 밭에 나가시면 코끼리차(포클레인) 끌고 와서 파 버린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마치 ‘소장님이 어머니에게 밭에 가시지 말라고 말씀 좀 잘해주세요’라고 읍소하듯. 하지만 아들이 가고 난 뒤 할머니는 다시 밭에 나간다. “갸가 흙 파먹는 재미를 알간디?”라고 씩 웃으며.
귀가 어두운 할아버지는 도시에 사는 딸과 팩스로 안부를 주고받는다. 어느 날 왕진을 간 박 소장에게 할아버지는 “알 낳는 거시기(팩스)가 고장 났다”고 하소연한다. 살펴보니 팩스 종이가 떨어진 것. 박 소장이 종이를 가져다 넣으니 밀린 편지가 주르륵 나오고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핀다.
모내기가 끝난 정갈한 논, 평생 농사짓느라 손마디가 굵어지고 누렇게 변한 손톱, 길쌈하는 할머니들….
산골의 하루하루와 이를 살아내는 이들의 모습이 운치 있게, 때론 질박하게 담긴 사진들에 오래 시선이 머문다. 귀가 어두운 노인들은 보건진료소에 전화한 뒤 잘 들리지 않아 계속 “거기 사람 있어요?”라고 묻는다고 한다. 이들과 부대낀 시간의 자취가 고스란히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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