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문학의 어머니 박경리선생, 그분 문학상 받는건 과분한 영광”

박선희 기자 , 김우창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장 입력 2020-09-17 03:00수정 2020-09-17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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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박경리문학상 수상한 소설가 윤흥길 씨
아홉 살 때 겪은 6·25전쟁의 참상과 그로 인한 충격이 윤흥길 작가에게 문학의 출발점이 됐다. 그는 “동시대인들의 가정사에 가해진 치명적 상처를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치유를 돕는 일이 작가로서 맨 먼저 해야 할 작업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토지문화재단 제공
윤흥길 작가(78)는 고향인 전북 완주에서 일제강점기 말부터 6·25전쟁 직후까지 한국근현대사의 굴곡을 다룬 대하소설 ‘문신’(전 5권)의 막바지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건강이 나빠지면서 집필을 잠시 중단했지만 얼마 전 몸을 추스른 뒤부터 “살얼음판 딛듯 근신”하며 밤새워 원고를 쓰고 있다. ‘문신’은 “큰 소설을 쓰라”고 한 생전 박경리 선생의 권유에 영향을 받은 작품. 2018년 3권까지 출간했다. “5권짜리를 대하소설이라 부르기 계면쩍다”며 스스로 ‘중하(中河)소설’이라 칭했다. 하지만 문학계에선 ‘완결되면 기념비적 작품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윤 작가의 박경리문학상 수상 소식은 이런 의미에서 더욱 각별했다. 건강 때문에 e메일로 수상 인터뷰에 응한 작가는 “내 문학의 어머니이자 스승인 박경리 선생님 이름으로 제정된 문학상을 받는 것은 과분한 영광일뿐더러 무쌍(無雙)의 기쁨이고 격려”라고 밝혔다.

작가 윤흥길 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전쟁과 산업화 과정에서의 부조리를 그려낸 ‘장마’와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다.

“어린 시절 우상 같은 존재였던 외삼촌의 전사(戰死) 통지서가 전달되는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외아들을 잃은 외조부모는 절손(絶孫)의 아픔 속에 고적한 말년을 보내다 돌아가셨습니다. 또 저를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했던 막내 이모는 서울이 수복되기 직전 이모부가 행방불명된 뒤 홀로 사시다 폐결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외가의 비극이 작가인 저에게 전쟁의 참상과 분단의 비극에 주목하게 만든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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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문제에 작가로서의 사명을 갖고 있다”고 밝혀온 작가는 대표작 ‘장마’에서 갈등 해결의 방법이 삶의 원초적 조건에 대한 깨달음임을 강조했다.

전쟁 발발 70년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는 이념갈등과 분열로 시끄럽다. 그는 “남북이 공유한 민족의 전통적 정서나 가치관을 공동체 안에 끊임없이 환기해 동질성을 확인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며 “집단이기주의에 사로잡히거나 철 지난 이념에 함몰돼 당장 코앞의 이익만을 노리고, 분단 현실을 정략적으로 악용하는 세력이 있는 한 국가의 장래는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기독교인인 그는 작가의 소명과 역할을 생각할 때 늘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이웃 사랑의 가르침을 마음에 붙잡는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나 작품일지라도 세상을 바꿀 힘은 없습니다. 갈대밭에 숨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목청껏 왜장치는 존재가 바로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만이 아는 비밀을 누설할 때 비로소 이발사는 구원을 받습니다. 작가로서 내 역할은 궁지에 몰린 이발사를 갈대밭으로 유인해서 상처의 고백을 통해 치유의 가능성을 느끼게 만드는 일이라 믿습니다.”

그에겐 중년 시절 좌(左)반신 마비가 찾아와 종합병원에서 뇌 컴퓨터단층촬영(CT)을 한 경험이 있다. 그때 창의적 사고를 관장하는 전두엽 크기가 보통 사람과 별 차이 없다는 걸 알았다. 처음에는 절망을 느꼈지만 천재가 아니라 범재(凡才)에 속함을 인정하고 나자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오히려 포기할 줄 모르는 끈기와 책상 앞에서 오래 버티는 무거운 엉덩이를 주신 창조주께 감사하게 됐다.

“천재의 번뜩임 못지않게 범재의 어기찬 노력도 빛나는 결과를 창출할 수 있음을 입증하려 기를 쓰며 썼다”는 회고처럼 부단히 썼고, 그렇게 발표된 작품들은 한국문학사의 뚜렷한 족적이 됐다. ‘묵시의 바다’ ‘에미’ ‘완장’ 등 10종이 넘는 장편소설에 20여 권의 소설집 산문집 연작소설집 등을 펴냈다.

이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연작소설집 ‘소라단 가는 길’(2003년)을 꼽았다. 그는 “환갑을 자축할 요량으로 그동안 쓰고 싶었으나 못 썼던 이야기들을 묶음으로써 초로인생의 중요한 기억들을 정리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잘난 자식보다 병약한 자식 쪽에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이 부모 마음인 것과 같다”고 말했다.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원로작가인 그에겐 젊은 시절부터 내내 품었으나 아직 이루지 못한 소망 하나가 있다. 대중교통 안에서 그의 책을 열독하는 ‘미지의 독자’와 우연히 마주치는 경험이다. 그는 “그렇듯 소박하고 간절한 소망인데도 늙정이가 되도록 그런 애독자 하나 못 만났다”고 했다.

“책의 자리를 휴대전화가 차지한 요즘 대중교통 풍경 속에서는 더더욱 성공할 확률이 떨어질 줄 알면서도 여전히 그 우스꽝스러운 꿈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저서를 출간해 왔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 딱한 신세지요.”

몸이 편치 않게 된 이후, 밤새워 글 쓰고 오후에 일상을 시작하는 집필 습관을 고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수십 년 묵은 생체리듬이라 아직은 별무성과”다. e메일 인터뷰 답신 역시 “밤을 새워서 썼다”며 하룻밤을 넘겨 바로 도착했다.

그는 “주치의한테 받은 돌연사 위험 경고가 내 소설이 가는 길에 자꾸만 딴죽을 걸곤 한다”며 “이번 수상을 계기로 건강이 회복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수한(壽限)이 다할 때까지 쓰고 싶은 작품, 써야 할 작품들을 꼭 쓰고 싶다”고 말했다.

윤흥길 연표
1942년 전북 정읍 출생
1961년 전주사범학교 졸업
1966년 부안 진서초등학교 석포분교 교사, 습작 시작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회색 면류관의 계절’로 등단
1973년 원광대 국문과 졸업, 숭신여자중·고등학교 교사, 일조각 편집부 근무, 동족상잔의 아픔과 화해 그린 ‘장마’ 발표
1977년 산업화시대 부조리 다룬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 발표,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3년 ‘완장’으로 현대문학상 수상, ‘꿈꾸는 자의 나성’으로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1995∼2008년 한서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2000년 ‘산불’로 21세기문학상 수상
2004년 ‘소라단 가는 길’로 대산문학상 수상
201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선출
2018년 대하소설 ‘문신’(1∼3권, 전 5권) 출간


▼ “전통-이데올로기적 대결의 모순관계 탁월하게 보여줘” ▼


‘윤흥길의 문학’ 심사평

박경리문학상 후보자 추천위원회는 해마다 시상식이 끝나는 11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1년간 후보자 선정 작업을 한다. 세 차례 예심을 거쳐 본심 후보 57명을 최종 후보 5인으로 축소했고 본격적인 심사와 논의 끝에 올 7월 수상 후보자를 결정하게 됐다.

최종 후보 서정인(84) 윤흥길(78) 황석영(77) 벤 오크리(61) 조너선 프랜즌(61)의 국적을 따져 보면 세 작가는 한국인이고 벤 오크리 작가는 나이지리아인, 조너선 프랜즌 작가는 미국인이다.

최종 후보 작가들의 생년과 국적을 언급한 이유는 작가와 작품의 세대나 역사, 사회 배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작가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의 엄청난 역사적 변화를 겪은 것이 근대 한국이다. 조선의 왕정 해체, 일본의 식민지 지배, 6·25 민족상잔 전쟁, 분단국가의 성립, 독재 정권의 산업화, 민주화라는 대사건, 그리고 이에 따르는 문화의 총체적 변화….

한국 작가들은 시대의 변화를 작품 속에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윤흥길 황석영 작가의 최근작이자 대표 작품 ‘문신’이나 ‘철도원 삼대’는 한국 사회가 거쳐 온 역사의 격동과 삶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서정인 작가는 더 광폭의 역사 변화를 체험한 세대에 속한다. ‘후송’ 등에서 실존적 시각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게 되는데, 물론 그러한 결정에도 사회 상황이 반영된다.

이 중 윤흥길 작가가 그리는 세계는 주로 농촌, 전라도의 농촌이다. 그 작품 속 농촌은 단순히 가난만이 아니라 여러 모순이 뒤엉킨 역사와 관습의 결합체로 묘사된다. 작가에게 농촌의 의미는 거기에 스며 있는 삶의 원초적인 모습에 있는 듯하다.

신화적 이야기를 통해 이를 교훈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편 ‘장마’다. 주인공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전쟁 탓에 시골 한집에 거주하게 된다. 외할머니의 아들은 국군 장교로 전사하고, 친할머니의 아들은 빨치산으로 공산군을 위해 싸운다. 두 할머니 사이에 갈등이 없을 수 없다. 친할머니는 빨치산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리라는 점쟁이 말을 믿는다. 그날 밤이 되자 아들 대신 구렁이 한 마리가 나타나고, 구렁이는 사람들에게 쫓겨 나무로 올라간다. 외할머니가 구렁이를 달래어 땅으로 내려오게 한 다음 대숲으로 들어가게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두 할머니가 화해하고 친할머니는 일주일 후 세상을 떠난다.

이 우화의 해석은 여러 가지일 수 있겠지만 구렁이는 원초적 생명을 대표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문제 해결의 길이 이념 투쟁이나 집단적 살육이 아니라 삶의 원초적 조건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윤흥길 작가의 작품들은 전통과 이데올로기적 대결의 여러 모순 관계를 탁월하게 보여준다. 아직 미완성 상태에 있는 ‘문신’ 또한 이러한 모순에 뒤얽힌 사건들을 이야기한다.

박경리문학상은 첫 회 이후 줄곧 외국 작가에게 시상했으나 이번에 작품의 규모나 문학 저술에 대한 생애적 헌신으로 보아 부족함이 없는 3인의 국내 작가가 최종 후보로 올랐다. 수없이 토의를 계속하고도 투표 과정을 거치고서야 윤흥길 작가를 수상자로 결정했다. 심사위원 모두의 축하를 전한다.

※‘2020 박경리문학상 심사 소감’을 요약한 것임.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김우창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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