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희 “기발한 위트, 낯설고 우스워… 번역의 맛 느꼈죠”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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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낯선 행성’ 번역한 황석희씨 e메일 인터뷰

황석희 씨는 “한국을 대표하는 외화 번역가는 김은주 님 등 여성 선배들이다. 나는 여전히 이분들의 작업을 보며 배우고 있다. 번역에 관심이 있다면 ‘나이브스 아웃’처럼 깔끔한 영어 대본을 구해 번역과 비교하며 즐겨보길 권하고 싶다”고 했다. 홍두리 사진가 제공
황석희 씨는 “한국을 대표하는 외화 번역가는 김은주 님 등 여성 선배들이다. 나는 여전히 이분들의 작업을 보며 배우고 있다. 번역에 관심이 있다면 ‘나이브스 아웃’처럼 깔끔한 영어 대본을 구해 번역과 비교하며 즐겨보길 권하고 싶다”고 했다. 홍두리 사진가 제공
“네가 발생(emerge)했을 때 이 행성이 있던 공전 위치로 다시 돌아왔다! (=오늘 네 생일이네!)”

“자식이 종이에 왁스를 입혔다. 지속 보존고에 붙여 놓겠다. (=얘가 그린 그림 좀 봐. 냉장고에 붙여놓을게.)”

최근 출간된 미국 만화가 네이선 W 파일의 ‘낯선 행성’(시공사·사진)은 ‘번역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짤막한 유머로 에둘러 던지는 만화책이다. 지구의 생활방식과 영어를 학습한 외계인이 더듬더듬 배움을 실천하는 이야기. 냉장고를 ‘지속 보존고(sustenance preserver)’라 표현하고, 풍선을 ‘신축성 숨 가두리(elastic breath trap)’라 부르는 서투름이 빚어내는 언어유희가 이 책의 백미다.

어설프게 번역했다가는 어색한 실소만 짓게 만들기 쉬운 내용이다. 적절한 한국어로 영어 개그의 분위기 전달과 뜻 해석을 동시에 해내야 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번역자 황석희 씨(41)의 이름을 확인하고 대부분 마음을 놓을 것이다.

황 씨는 한국 영화 관객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스타 번역가다. 끊임없이 쫑알대는 안티히어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데드풀’(2016년) 개봉 후 “번역자에게 상을 줘야 한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년)가 감독 루소 형제가 언급할 정도로 심각한 오역 논란에 휘말린 후 “후속편 ‘엔드게임’ 번역은 황석희에게 맡겨 달라”는 팬들의 요구가 빗발치기도 했다.

책 출간을 맞아 동아일보와 가진 e메일 인터뷰에서 황 씨는 “거의 모든 단어를 일반적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로만 사용한 게 재밌었다”고 말했다.

“‘change’라고 하면 될 상황에서 굳이 ‘alter’를 쓴다든가…. 의미가 비슷하지만 뉘앙스가 다른 단어들을 골라서 사용했어요. 그게 낯설면서 우스워요. 책 전체가 기발한 위트로 채워져 있어서 번역하는 재미가 컸어요. 가급적 영어 원문을 함께 읽기를 권합니다.”

만화 ‘낯선 행성’은 지구 말을 갓 배운 외계인들의 대화를 코믹하게 그렸다. 시공사 제공
만화 ‘낯선 행성’은 지구 말을 갓 배운 외계인들의 대화를 코믹하게 그렸다. 시공사 제공
피자라는 단어를 모르는 책 속 외계인은 전화로 주문을 하며 “방대한 원형 반죽 위에 식용 가능한(edible) 것들을 다양하게 쌓아 달라. 곰팡이 슬라이스도 추가해 주고”라고 말한다. 한국어 단어를 세심하게 선택해 영어생활권에서만 통할 만한 농담을 무난하게 번역해내는 황 씨의 솜씨를 책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번역은 원작자의 의도를 최대한 파악해 온전하고 충실하게 옮기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번역은 실패의 기술’이라고 한 움베르토 에코(1932∼2016)의 말에 동의해요. 완벽한 번역은 불가능하고, 번역자는 늘 원문과 싸우다가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죠. 불가능한 승리를 꿈꾸며 무리하는 것보다 현명한 실패와 패배의 길을 모색하는 게 낫다고 봅니다.”

최근 뮤지컬 번역으로 작업 영역을 넓힌 그는 블로그를 통한 ‘애프터서비스 번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오류가 발견되면 블로그에서 사과하고 DVD와 블루레이 자막을 수정한다. 황 씨는 “소통로를 통해 무례하게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닫아도 블로그는 계속 할 것”이라고 했다.

“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은 따로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꾸역꾸역’ 억지로 하는 거죠. 프로라면 누구든 그렇지 않을까요. 나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번역자인 아내가, 다행히 늘 큰 힘이 돼 줍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스타 번역가#황석희#낯선 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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