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곡의 시대 꿋꿋이 맞선 여성 예술가들 삶에 경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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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장편 ‘시선으로부터’ 펴낸 소설가 정세랑

만약 지난 세기 여성 예술가들이 일찍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일가를 이뤘다면 어땠을까? 작가는 이번 소설이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고 말했다. 문학동네 제공
만약 지난 세기 여성 예술가들이 일찍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일가를 이뤘다면 어땠을까? 작가는 이번 소설이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고 말했다. 문학동네 제공
《한국과 미국에 떨어져 살던 가족이 모두 하와이로 모인다. 단 한 번뿐인 특별한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다. 고인에 대한 저마다의 기억을 갖고 자유롭게 하와이를 둘러본 뒤 가장 의미 있는 순간들을 수집해 오는 제사다. 정세랑 작가(36)가 4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문학동네·사진)는 시대를 앞서 산 여성 예술가 심시선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경쾌하고 따뜻한 터치로 그려낸 작품이다. 화가이자 작가인 심시선은 6·25전쟁 때 가족을 잃고 새 삶을 찾아 하와이, 유럽 등에 체류한 여성 지식인이다. 두 번의 결혼과 파격적 언행 등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은 유명 인사였다.》

지난달 말 예약 판매를 시작하면서부터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반응이 빠르고 좋다. 3대가 한자리에 모이다 보니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살다 간 예술가의 삶뿐만 아니라 현대사 한 세기가 모두 드러나는데 아픔과 굴곡의 역사도 작가의 손끝에서 뭉클하게 버무려진다.

SF로 등단한 뒤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 중인 그는 “책이 여전히 근사한 매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느리지만 정교한 대화의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라고 출간 소감을 밝혔다. 작가와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가족들이 여행을 시작하면서 강연록, 잡지 인터뷰, 회고록 등을 통해 20세기를 치열하게 살아온 여성 예술가 심시선의 삶이 드러난다. 지난 세기 여성 예술가를 소설에서 다루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어떤 작가의 업적이 잘 보존됐거나, 유난히 지워졌는지를 살펴보면 전체 지형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20세기 여성 작가들은 특히나 평가절하를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보이지 않는 권력이 특정 집단의 발밑을 단단하게 만들고, 다른 집단의 발밑은 모래로 허무는 것을 경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만나본 적 없는 예술가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지키는 쪽이 되고 싶어서 그런 바람을 소설로 그렸다.”

정 씨는 ‘작가의 말’에 “김명순이나 나혜석에 나의 계보가 있음을 깨닫는 몇 년이었다”며 “혹독한 지난 세기를 누볐던 여성 예술가들이 죽지 않고 일가를 이뤘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봤다”고 썼다. 그는 “누가 될 것 같아 특정인을 모델로 삼지는 않았지만 당시 여성 작가들의 글을 찾아 읽으며 문체, 어휘를 익혔다”며 “전쟁과 분단, 가난과 독재가 큰 압력이었을 텐데도 ‘참 꼿꼿하고 멋진 심지를 가진 분들이었구나’ 자주 감탄했다”고 말했다.

―가족들의 추도식 배경을 하와이로 정한 이유는….

“북미와 중남미에 가족들이 이민 가거나 파견을 간 적이 있어서 ‘가운데인 하와이에서 만나자’는 농담을 하곤 했다. 개인적 농담에서 시작되었지만 최근 몇 년간 하와이 이민사에 관련된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왔고 거칠었던 지난 세기를 용감하게 개척한 분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2016년 하와이 답사는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가장 즐거운 기억 중 하나라 여행이 어려워진 시기란 것이 슬프다. 전 세계적 위기를 잘 이겨내는 데 소설이 사람들 곁에 있어줬으면 한다.”

―작품을 쓰는 동안 가장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과제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동시에 읽기 괴로운 책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면 괴로워질 수밖에 없는데, 2020년은 현실이 이미 혹독하니까. 재미와 의미를 오가면서 균형을 잡는 게 가장 어려웠다.”

―앞으로 꼭 쓰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한동안은 오락적인 소설을 쓰고 싶다. 통일신라를 배경으로 한 경쾌한 추리소설을 준비 중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시선으로부터#소설가 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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