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무기 운반에만 1500명… 동포들 피땀이 승전 밑거름

조종엽 기자 입력 2020-06-04 03:00수정 2020-06-04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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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 승전 100주년… 박환 교수 ‘독립군과 무기’ 출간
올해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을 맞아 독립군 승리의 바탕이 된 무장과 보급에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사진은 1920년대 초까지 활약한 독립군인 한창걸 부대. 선인 제공
“물품의 가격 액수는 결코 소액이 아닙니다. 가령 소액이라 하더라도 해당 물품은 아군의 정신이고 또한 우리 민족의 심혈입니다.”

독립운동 단체 대한국민회 회장 대리 서상용(1873∼1961)이 1920년 중국군이 압수한 독립군의 군수품을 돌려받기 위해 작성한 문서 중 일부다. 압수품은 재봉기계와 총기용 기름, 군복, 약품 등이었다. 서상용은 이 글에서 “절대 타국 군인이나 민족에 위탁할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4일로 봉오동 전투가 시작된 지 100주년을 맞는다. 독립군이 대승을 거둔 건 1920년 6월 7일이지만 전투의 시작은 사흘 전인 6월 4일 홍범도(1868∼1943) 최진동(1882∼1945) 부대의 함북 종성군 일본군 헌병 초소 습격이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전개에 관해서는 연구가 적지 않지만 막상 승리의 바탕이 된 독립군의 무기와 보급 연구는 아직 부족한 편이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최근 발간한 ‘독립군과 무기’(선인)에서 독립군 무장 현황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봤다.


책에 따르면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무장투쟁 노선으로 전환한 뒤 1920년 말까지 무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북로독군부만 해도 당시 소총 900여 정과 폭탄 100여 개, 권총 약 200정, 기관총 2문 등을 갖추고 있었다. 탄환도 총 1정에 150발씩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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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이 사용하던 무기들. 위쪽부터 러시아제 모신 나강 소총, 독일제 마우저98K 소총, 일본제 38식 아리사카 소총. 선인 제공
이 같은 무장은 간도 동포들의 피와 땀에서 비롯됐다. 1920년 7월 서상용의 보고를 보면 당시 장총 한 정은 탄환 100발 등을 포함해 35원이었다. 이는 그 시절 간도 노동자 한 명의 한 해 노임(30∼45원)과 맞먹는다.

한인들은 금비녀부터 요강까지 독립군을 위해 군자금으로 내놨다. 청산리 전투 당시 사용한 무기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철수하던 체코군단으로부터 구입한 것이라는 건 널리 알려져 있다. 책에 따르면 당시 체코의 골동품 시장에는 무기대금으로 받은 한국인의 금반지, 비단 보자기 등이 흘러나왔고, 놋요강도 끼어 있었다고 한다. 북간도의 철혈광복단은 용정에서 일경을 습격해 15만 원을 빼앗아 군자금으로 쓰기도 했다.

한인들은 전투요원은 아니더라도 무기 운반대원으로 나섰다. 독립군의 무기는 중국과 러시아 국경지대 한인들이 육로와 해로로 반입했다. 어깨에 직접 메고 나르거나, 밀송선 수레 말 우마차를 동원했다. 대한군정서에 관한 일본 측 보고는 1920년 무기 운반대원이 “노령 방면에서 약 1500명의 운반대를 모집함으로써 불일간 병기와 함께 도착하게 됐다”고 적었다. 북로군정서 분대장이었던 이우석 역시 200여 명의 운반대원이 장총과 탄환 ‘200짐’을 운반했다고 생전 구술했다.

왼쪽부터 러시아제 맥심 기관총, 수류탄. 선인 제공
전투요원의 생활도 열악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한국민회의 군사 훈련에 대한 일본 측 보고는 “식사는 가장 조악한 조밥에 부식물로는 한인이 먹는 야생초, 파를 넣은 된장국뿐”이라고 했다.

어렵게 확보한 독립군의 무기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독일 벨기에 미국 프랑스 영국 제품이었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노획한 것도 있었다. 박 교수는 “독립군은 동포들의 자발적 희생으로 만든 상당한 수준의 무장을 갖고 있어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독립군과 무기#박환. 봉오동전투#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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