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눈멀고, 코가 떨어지는 ‘화류병’을 없애려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22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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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6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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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독 328명→623명, 임질 319명→576명, 횡현 63명→152명, 연성하감 99명→149명.’

일제강점기 남대문 밖 복숭아골에 있었던 세브란스병원의 성병 환자 수입니다. 앞은 1917년, 뒤는 1919년 숫자이니 2년 새 병의 종류에 따라 적게는 50%, 많게는 141%나 늘어난 겁니다. 1920년 6월 7일자 동아일보는 이 통계를 소개하며 이런 ‘화류병’이 해마다 느는 것은 풍기문란 탓이라고 개탄했습니다. 당시에는 성병을 주로 화류병이라 불렀습니다. 화류계에 출입하는 사람이나, 창기(娼妓) 예기(藝妓) 작부 등 화류계 여성들에 의해 전염되는 부정한 행위의 결과로 여겼기 때문이죠.

교육을 받고 있는 1920년대 경성 신정 유곽의 창기들. 신정 유곽과 같은 공창은 창궐하는 성병의 진원지로 지목됐으나 일제강점기 내내 유지됐다.
교육을 받고 있는 1920년대 경성 신정 유곽의 창기들. 신정 유곽과 같은 공창은 창궐하는 성병의 진원지로 지목됐으나 일제강점기 내내 유지됐다.

신문 지면에서 성병 관련 숫자는 그 뒤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1921년 5월 18일자 사설은 모 병원의 전체 환자 중 매독 환자 비중이 1917년 10.5%에서 1920년 12%로 늘어났다며, 매독으로 가장 유명한 프랑스도 그 비율이 12%를 넘지 않으니 매독에 관한 한 조선이 세계 일등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꼬집었습니다. 또 1925년 8월 29일자 기사는 총독부 조사결과를 인용해 ‘조선 내 화류병 환자는 조선인이 1000명당 2명, 일본인이 1000명당 59명’이라고 보도했습니다. 1928년 12월 2일자에는 ‘청년 그 이상 인구의 50%, 즉 반수가 화류병 환자로 봄이 적당하다’는 대목도 나옵니다. 실제 그 정도야 아니었겠지만 당시 성병은 결핵 등과 함께 조선 사람들을 괴롭힌 대표적인 질병이었던 건 틀림없습니다.

1920년대의 한 성병 광고. ‘가볍게 볼 수 없는 우리 인류사회의 중대문제는 매독과 임질’이라는 제목으로 성병의 해독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1920년대의 한 성병 광고. ‘가볍게 볼 수 없는 우리 인류사회의 중대문제는 매독과 임질’이라는 제목으로 성병의 해독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위생상태가 좋지 않았고 뾰족한 치료방법도 없던 당시, 성병은 정말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매독에 걸리면 전신에 종기가 나고 코가 떨어지고 유전되며, 임질도 부인에게 옮으면 자궁병이 돼 태아가 눈이 멀고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경고가 지면 곳곳에 나타납니다. 코가 떨어지는 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임질 균이 침입해 생기는 농루안(膿漏眼)은 심하면 실명할 수도 있다니 이런 경고가 과장만은 아닌 듯합니다.

성병의 공포는 적지 않은 사회문제를 낳았습니다. 아내에게 매독을 옮긴 남편이 오히려 “병 있는 여자와 살 수 없다”며 아내를 본가로 내쫓아 결국 맞소송을 한 부부, 시동생에게 성폭행을 당했는데 성병까지 옮아 끝내 극단적 선택을 한 여인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인육(人肉)을 먹으면 성병이 낫는다는 허황된 말을 듣고 매독에 걸린 여인이 묘지를 파헤친 오싹한 얘기도 당시 신문에 나옵니다.

1930년대에는 성병 전면광고도 눈에 띈다. 병에 걸린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의 사진을 비교하며 약의 효능을 내세운 광고.
1930년대에는 성병 전면광고도 눈에 띈다. 병에 걸린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의 사진을 비교하며 약의 효능을 내세운 광고.

반면 성병 약 광고는 대목을 맞았습니다. ‘실로 매독과 임질은 일가를 멸망하고, 일국을 재난에 빠뜨리는 망국병이라 해도 과도한 폭언이 아니다’, ‘천하의 두려운 병이지만, 증세에 따라 도수를 맞춰 쓰면 단번에 단근(斷根)됨을 단언…’ 등의 카피는 양반입니다. 종창이 얼굴을 뒤덮거나 코가 떨어져나간 성병 환자의 합성사진(?)을 싣고 ‘이렇게 무서운 지경에 이른 환자라도 속히 전치될 수 있습니다’라고 큰소리치는 광고도 많았습니다.

동아일보는 성병의 진원지로 지목된 경성 신정 유곽 등 공창(公娼)을 폐지하라고 역설했습니다. 1927년 8월 7일자 사설 ‘공창과 사창’은 일본이 자국의 요코스카 공창을 폐지한다는 소식을 전하며 조선에서도 공창을 그대로 놔둘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지요. 공창을 없애면 사창(私娼)이 될 뿐이라는 반론에 대해서는 ‘설령 그럴지라도 (창기들을)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키고 자기 계산으로 영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니 폐지함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매춘업 관련 세금이 세입예산의 10%에 이를 만큼 큰 수입원이었던 일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내내 유지됐던 공창은 결국 1948년에 가서야 불법화됐습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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